오피니언 사설

절반의 성공에 그친 문 대통령의 유럽 순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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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문재인 대통령이 유럽 5개국 순방을 마치고 어제 돌아왔다. 이번 순방은 문 대통령이 전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초청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는 점에선 성공이다. 교황은 그간 미국-쿠바 간 국교 정상화 및 콜롬비아 평화협정 타결 때 큰 활약을 해 평화의 사도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런 그의 방북은 비핵화는 물론 북한의 정상국가화에도 디딤돌이 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유럽에서 대북제재 완화를 호소했다가 쓴맛을 봤다. 북한은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비핵화를 했으니 제재를 늦춰줘야 한다는 게 문 대통령의 논리였다. 그러나 반응은 싸늘했다. 프랑스·영국 정상 모두 설득당하기는커녕 요즘엔 미국도 쓰지 않는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CVID)’를 주문했다. 결국 “북한에 CVID를 요구한다”란 표현은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 공동성명에 들어갔다. 유럽을 지렛대 삼아 제재 완화를 끌어내겠다는 구상이 실패한 셈이다.

이런 패착은 정부의 잘못된 상황 인식 탓이다. 선도적 제재 완화로 비핵화에 활기를 불어넣겠다는 정책을 유럽이 지지할 거로 믿었다면 큰 착각이다. 제재를 늦춰줌으로써 북한의 비핵화 의지에 힘을 실어줘야 한다는 게 정부의 주장이지만 구미의 인식은 다르다. 더 제재를 옥좨야 비핵화가 성공한다고 이들은 믿는다.

중간선거를 앞둔 미국은 비핵화를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으로 돌았다고 한다. 빠르면 11월 중 열릴 것 같던 2차 북·미 정상회담도 내년으로 미뤄진 모양이다. 올해 종전선언을 끝낸 뒤 내년부터 남북 교류에 속도를 낸다는 정부의 계획도 물 건너가는 분위기다. 이런 실수는 바람과 현실을 못 구별하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아랑곳없이 한국이 끌고 가면 북핵 문제는 잘 풀릴 거란 생각은 착각이자 오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