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명품 브랜드에 떼돈 벌게 해준 순수예술가들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허유림의 미술로 가즈아(11)

1996년 언론은 크게 술렁였다. ‘범스터’ 라는 엉덩이를 반쯤 보여주는 기이한 패션으로 영국 사회를 놀라게 했던 패션계의 악동 알렉산더 맥퀸(1969~2010년) 이 지방시의 수석디자이너로 발탁됐기 때문이다. 지방시는 위베르 드 지방시가 1952년 설립한 프랑스 명품 브랜드였다. 언론은 노동계 출신으로 상류사회의 문화와 패션을 경험해 보지 않은 맥퀸이 어떻게 지방시를 이끌어나갈지 궁금해했다.

맥퀸이 보여준 범스터 패션. 모델의 엉덩이가 노출될 정도로 밑위 길이가 짧아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맥퀸은 엉덩이 노출 의도가 아닌 '척추 아래 부분의 연장'을 이야기했다. [사진 허유림]

맥퀸이 보여준 범스터 패션. 모델의 엉덩이가 노출될 정도로 밑위 길이가 짧아 논란의 대상이 되었지만 맥퀸은 엉덩이 노출 의도가 아닌 '척추 아래 부분의 연장'을 이야기했다. [사진 허유림]

지방시의 구원투수로 떠오른 맥퀸

그러나 맥퀸의 발탁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당시 성, 폭력, 마약이 난무하고 하위문화와 상위문화의 경계가 흔들리던 시기에 대중이 접했던 것은 야만이었다. 기존 가치는 함몰됐고, 자기파괴와 죽음은 시대적 문화현상으로 떠올랐다. 사회는 나아갈 방향을 알지 못했고, 이는 명품브랜드도 마찬가지였다.

맥퀸이 지방시의 구원투수로 떠올랐다. 그리고 옆에서 이를 조용히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었다. 영국의 젊은 작가들을 키우는 데 앞장섰던 찰스 삿치(1943년~)였다.

런던의 미디어 대부이자 삿치앤삿치 라는 광고회사를 운영하던 그는 사회의 흐름을 꿰뚫고 키워드를 읽어내는 데 귀재였다. 1979년 유럽 최초의 여자 수상이자 3선인 마거릿 대처의 선거 캠페인 슬로건 ‘노동당은 일하지 않는다.’로 대처의 승리를 이끌었던 그가 주목했던 ‘죽음’이라는 현상은 맥퀸뿐만 아니라 그가 수집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데미안 허스트(1965년~), 마크 퀸(1964년~) 같은 젊은 작가의 작품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그는 자신의 소장품을 1997년 영국예술의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왕립예술원에서 전시하면서 1억원에 구매한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을 140억원에 팔아 화제가 됐다.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1991년 作 [사진 허유림]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 1991년 作 [사진 허유림]

이에 대해 많은 이들은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러나 시대가 변하면 그 안에 담긴 가치 또한 변하기 마련이다. 기존의 감정적이고 심미적인 것만을 중시하던 예술에서 작가가 살았던 시대를 증언하고, 사회적 가치를 다시 미적 가치로 환원시키는 시도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1만 원짜리 전시 포스터가 27만원에 거래돼

동시대를 살았던 알렉산더 맥퀸과 데미안 허스트의 공통 키워드는 야만과 죽음이었다. 2010년 맥퀸의 사망 직후 뉴욕의 패션 컨설턴트 로버트 버크는 블룸버그와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샤넬이나 베르사체처럼 브랜드 이름이 디자이너보다 더 알려진 명품 회사와 달리 맥퀸은 디자이너 본인의 역량이 브랜드의 핵심가치이기 때문에 앞으로 브랜드를 지켜나가는 것이 무척이나 힘겨운 일이 될 것이다.”

2015년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에서 열린 알렉산더 맥퀸의 전시 포스터. [사진 허유림]

2015년 런던 빅토리아 앤 앨버트 뮤지엄에서 열린 알렉산더 맥퀸의 전시 포스터. [사진 허유림]

그러나 맥퀸이 보여준 야만의 미는 패션과 순수예술의 경계를 넘나들며 소비되고 있다. 2011년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열렸던  맥퀸의 전시회가 2015년 런던에서 다시 열렸을 때 예매 티켓은 자그마치 7만장에 이르렀다. 당시 1만원 정도에 판매됐던 전시 메인 포스터는 매진을 기록했고 현재 이베이의 중고 사이트에서 27만원에 거래되고 있다.

1억원이 140억원을 만들어내고, 1만원이 다시 27만원이 되는 현상 뒤에는 눈 밝은 사람들이 읽어낸 사회적 가치, 그 당시의 시대 가치가 들어있다. 그리고 이 시대 가치는 2018년 현재 또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변해 관객들과 만나고 있다.

당시 전시장 모습 중 일부. [사진 허유림]

당시 전시장 모습 중 일부. [사진 허유림]

서울 종로구 서촌의 대표적 명소 대림미술관에서는 현재 ‘나는 코코 카피탄, 오늘을 살아가는 너에게(Coco Capitán: Is It Tomorrow Yet?)’라는 전시가 진행 중이다. 작가 자신이 직접 겪은 감정을 담은 사진과 그림, 영상, 설치 등 총 150여 점을 선보이고 있는데, 전시장을 찾은 이들에게 마치 자신이 코코 카피탄이 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실제 이것은 관람객이 원하는 포인트와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사진작가 코코 카피탄(26)은 스페인 남부에서 태어나 자유분방하게 성장했다. 그러나 8년 전 영국 런던 패션대학 사진 과에 입학했을 때 문화적 충격을 느꼈다고 한다. 엄격한 영국식 교육 방식에 적응하기 힘들었고, 열여덟살 예민한 시기에 정체성 혼란을 겪던 그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스페인 남부는 소비문화·자본주의와 거리가 먼 곳이었어요. 친구들은 어떤 옷을 입을지 별로 고민하지 않았죠. 그런데 영국에서는 패션 트렌드를 따라가는 게 중요했어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에 영향을 많이 받았죠. 집 스타일과 어떤 브랜드를 소비하는지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구찌와 협업한 사진작가 코코 카피탄

작가는 사진 외에도 글, 그림, 영상, 설치미술 등을 통해 혼란스러운 심경을 표출했다. 스스로 상업예술과 순수예술의 경계를 고민한 흔적에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대 출생한 세대)가 열광하기 시작했다. 정체성 혼란은 젊은 세대의 공통 고민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탈리아 명품 구찌로부터 ‘영 아트 스타’로 선정되는 영광도 누렸다. 구찌는 사진보단 작가의 개성이 고스란히 담긴 그의 손글씨에 주목했다. ‘I want to go back to be-living a story''Tomorrow is Now Yesterday' 등의 손글씨가 들어간 협업 티셔츠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예술작품은 사회적 가치를 담고 독특한 시각 언어로 탄생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가격으로 되돌아온다.

허유림 RP' INSTITUTE. SEOUL 대표 & 아트 컨설턴트 heryu122982@gmail.com

관련기사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