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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를 익사한 창녀로…신부들을 질겁케 한 카라바죠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허유림의 미술로 가즈아(8)

이탈리아 로마의 나보나 광장 뒷골목에 있는 산 루이지 교회. 바로크 시대에 로마 주재 프랑스 대사관이기도 했던 이곳 주변은 예나 지금이나 관광객으로 북새통을 이룬다.

때는 1600년경. 미술학교 성 루카 아카데미의 원장 추카리가 어두컴컴한 산 루이지 교회를 곧장 가로질러 한 그림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말없이 그림을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신음 같은 탄식이 흘렀다. “이건 새로운 미술이야.”

추카리의 감탄을 자아낸 작품은 카라바죠의 그림 ‘예수의 부름을 받은 마태오’(1599~1600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화가이자 당대의 미술 이론을 정리한 대학자 추카리가 두말없이 인정했다는 그림에 대한 소문은 그날 저녁 발 빠르게 퍼져나갔다.

당대의 최고 화가도 헷갈린 카라바죠 그림

예수의 부름을 받은 마태오. <성 마테오의 소명(The Calling of St Matthew) 1599-1600>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이탈리아) ⓒpublic domain(공개도메인) [출처 wikipedia]

예수의 부름을 받은 마태오. <성 마테오의 소명(The Calling of St Matthew) 1599-1600>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산 루이지 데이 프란체시 성당(이탈리아) ⓒpublic domain(공개도메인) [출처 wikipedia]

바로크 미술의 거장이자 한 시대를 풍미한 카라바죠, 그의 그림은 너무 간단했다. 등장인물과 탁자가 전부였다. 그러나 누가 진짜 마태오인지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미술사학자 곰브리치는 탁자 한복판의 검정 베레모가 주인공이 아닐까 조심스레 견해를 밝혔다. 등을 돌린 칼잡이를 제외하곤 죄다 한 차례씩 후보에 올랐다. 누가 진짜 마태오일까?

작품을 보는 관람객 대부분은 탁자 한복판의 검은 베레모를 마태오라고 생각할 것이다. 준수한 외모가 주는 신뢰감과 중앙에 배치된 인물에 집중하려는 심리가 함께 작용한 때문이다. 아마 추카리도 그가 마태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태오는 전혀 엉뚱한 인물이다. 탁자 끄트머리에 앉아 고개를 숙인 젊은 세리가 바로 그다. 작가는 왜 잘 보이지도 않는 구석에 중요한 인물을 그린 것일까? 미술 학교 성 루카 아카데미 원장 추카리의 탄식을 자아낸 카라바죠의 그림은 어떻게 거기에 걸리게 된 것일까?

그 시작은 종교 개혁이었다. 1517년 10월 31일 종교 개혁가 마르틴 루터는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의 면죄부 판매과 연옥에 대한 교황권 주장, 공로 사상을 비판한 95개 항의 반박문을 발표한다. 성경의 권위와 은혜, 그리고 믿음을 강조함으로써 부패한 교회와 교회 제도를 새롭게 개혁하고자 했다. 또한 십자군 전쟁 이후 봉건 사회가 점차 무너지고 상업이 발달하는 가운데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 구조에 변화가 생겨났다. 국가주의의 등장으로 스페인과 프랑스에서는 이미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래 들어왔고, 교황권의 몰락은 교회 개혁을 가속화했다.

로마 가톨릭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1545년 트렌트 종교회의가 소집된다. 회의 내용의 주된 골자는 종교 예술은 가톨릭 교회의 뜻을 알리는 도구로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미 교리는 지식을 가진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글을 읽지 못하는 대중도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시됐다. 그러려면 복잡한 도상보다 한 눈에 이해할 수 있는 주제를 표현해야 한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예술은 결국 사람들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였다. 이는 종교개혁이라는 이름 앞에 권위를 내려놓고 ‘나도 똑같은 사람이오.’라고 외치는 예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과 호흡하는 미술은 그렇게 변화한다. 결국 변화를 받아들이며 사회를 이끌어가는 이들이 르네상스가 추구했던 조화를 깨트리고, 생생한 감동미와 생동미를 요구했던 것이다. 하나의 그림이 제공하는 믿음과 감동, 카라바죠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맞추고 있었다.

예수의 허리를 찔러 보는 성도마

의심하는 성도마의 원본(위)과 확대본(아래). <세인트 토마스의 불신(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Sanssouci(포츠담) ⓒpublic domain(공개도메인) [출처 wikipedia]

의심하는 성도마의 원본(위)과 확대본(아래). <세인트 토마스의 불신(The Incredulity of Saint Thomas) 1601>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Sanssouci(포츠담) ⓒpublic domain(공개도메인) [출처 wikipedia]

‘의심하는 성도마’의 주제는 요한복음 20장 24절에 등장하는 이야기로 믿음에 관한 것이다. 열두 제자 중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목도하지 못해 이를 믿으려 하지 않다가  예수의 옆구리에 난 상처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나서야 마음을 바꿨다는 내용이다. 6세기경 미술 작품의 주제로 등장한 이 내용은 당시 낯선 주제는 아니었다.

문제는 카라바죠가 표현한 방식이었다. 에둘러 표현하는 배려는 애초에 철저히 무시됐다. 그리스도는 성흔이 선명히 남은 손으로 검지를 쭉 편 도마의 손을 움켜쥐고 자신의 상처 속으로 집어넣고 있다. 때 낀 손톱과 거친 피부의 이 의심하는 손가락은 섬세하고 연약한 것에 가하는 충격과 고통을 강조하는 듯하다.

당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 작품은 프란체스코 마리아 델 몬테 추기경을 비롯해 루도비지 가문 등이 복사본을 소장했다. 1606년 카라바조의 후원자 중 한명인 빈센초 주스티니아니가 그림의 소유자가 되었다는 것이 가장 이른 기록이다.

카라바죠의 마리아 그림 거부한 교회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 카라바조(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작품. 마리아를 익사한 창녀의 모습으로 표현한 당시 카라바조의 표현때문에 교회에 걸리지 못했다. <성모의 죽음(Mort de la Vierge) 1606>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루브르 박물관(프랑스) ⓒpublic domain(공개도메인) [출처 wikipedia]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 카라바조(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의 작품. 마리아를 익사한 창녀의 모습으로 표현한 당시 카라바조의 표현때문에 교회에 걸리지 못했다. <성모의 죽음(Mort de la Vierge) 1606>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루브르 박물관(프랑스) ⓒpublic domain(공개도메인) [출처 wikipedia]

로마의 빈민가인 트라스테베레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 교회는 빈민을 위한 성직자의 봉사로 유명한 곳이었다. 이곳에서 작품을 의뢰받은 카라바죠는 화려하지 않은 동정녀 마리아의 죽음이 큰 공감을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의 구상은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마리아는 실제로 죽은 인물로 묘사되지 않았다. 예수의 수태가 순결하게 이뤄졌듯이 마리아의 죽음도 단순한 죽음으로 묘사될 수 없었다.

문제는 카라바죠가 이것을 실제 죽음으로 묘사한 점이다. 이 그림 속의 마리아는 육체의 죽음을 경험했고, 특히 그 육체는 익사한 창녀 - 테베레 강에 빠져 죽은 오르타키오 구역의 매음굴 창녀 - 의 몸으로 그려졌다. 카라바조의 마리아는 강에서 금방 건져 올려진 것처럼, 붉은 드레스 아래로 퉁퉁 불어버린 검푸른 발을 내보이고 침대 위에 숨진 채 누워있었다.

카라바죠는 이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충격을 받기보다 애끊는 슬픔을 경험하기 바랐다. 그러나 트라스테베레 산타 마리아의 신부들은 세속화한 마리아의 묘사에 질겁했다. 그들은 죽음이 사실적일수록 슬픔 역시 설득력을 얻는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결국 이 그림은 교회에 걸리지 않았고, 5년 뒤 페테르 파울 루벤스가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1627년 영국의 찰스 1세가 구입하는데, 그가 죽고 나자 뱅커였던 에버하르트 자바크가 1649년 경매에 부친다. 이를 다시 1671년 루이 14세가 구매했다.

성모의 죽음. 카를로 사라체니의 작품이다.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 교회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거절하고 카를로 사라체니의 작품을 선택했다.<성모의 죽음(Mort de la Vierge) 1606> 카를로 사라체니(Carlo Saraceni), 로마(이탈리아) ⓒpublic domain(공개도메인) [출처 wikipedia]

성모의 죽음. 카를로 사라체니의 작품이다.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 교회는 카라바조의 그림을 거절하고 카를로 사라체니의 작품을 선택했다.<성모의 죽음(Mort de la Vierge) 1606> 카를로 사라체니(Carlo Saraceni), 로마(이탈리아) ⓒpublic domain(공개도메인) [출처 wikipedia]

현재 작품 소장처는 루브르 박물관이다. 당시의 변화하는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카라바죠의 그림을 거절한 산타마리아 델라 스칼라 교회는 카를로 사라체니의 작품을 선택했다.

많은 사람은 여전히 아름다움에 대해 순수하고 깨끗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은 변화하는 시대에 그냥 살아간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현실에 발을 딛고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다시 한번 살펴본다면 단순히 예쁜 것 이상의 처절함이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카라바조의 작품도 변화하는 시대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갈수록 거세지는 문화전쟁과 관련해  다음호에서는 제국주의와 맞물린 식민지 약탈 전쟁을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허유림 RP' INSTITUTE. SEOUL 대표 & 아트 컨설턴트 heryu1229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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