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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프리다 칼로, 에민…처절한 고통이 예술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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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더,오래] 허유림의 미술로 가즈아(10)

케이팝 그룹인 방탄소년단(BTS)이 뉴욕 유엔본부 신탁통치이사회 회의장에서 열린 유니세프의 새로운 청소년 어젠다인 ‘제너레이션 언리미티드(Generation Unlimited)’ 파트너십 출범 행사에 참석해 RM이 대표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케이팝 그룹인 방탄소년단(BTS)이 뉴욕 유엔본부 신탁통치이사회 회의장에서 열린 유니세프의 새로운 청소년 어젠다인 ‘제너레이션 언리미티드(Generation Unlimited)’ 파트너십 출범 행사에 참석해 RM이 대표로 연설하고 있다. [연합뉴스]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방탄소년단(BTS)이 한국시각 9월 25일 유엔총회에서 ‘스스로를 사랑하자!’라는 주제로 연설했다. 연설 중 가장 회자가 되는 부분은 마지막에 나온 “What’s your name? Speak yourself”라는 말이다. 온전한 자신을 보여달라는 메시지는 많은 이들에게 울림이 되고 있다.

방탄소년단이 말한 ‘Speak yourself’는 새로운 것이 아닌, 이미 누구나 다 공감하고 있는 것을 환기해준 좋은 사례이다. 이미 서점가에선 ‘자존감’이라는 키워드가 대세로 자리 잡았다. 많은 콘텐츠가 ‘자아(自我)’를 공통으로 이야기한다. 미술의 역사 속에서 우린 예술과 문화의 변화가 인간의 자아의식 형성과 발전의 맥락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예술은 문화의 총체적 현상을 담는 그릇이기 때문이다.

이때 자아를 들여다보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는 ‘정직’이다. 그리고 예술은 이 정직함이 얼마나 큰 폭발력을 가졌는지 이미 오래전부터 보여주고 있다.

스페인 궁정화가이자 근대회화의 아버지 프란시스코 고야. [중앙포토]

스페인 궁정화가이자 근대회화의 아버지 프란시스코 고야. [중앙포토]

스페인의 궁정화가이자 근대회화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프란시스코 고야(1746-1828). 그는 18세기 스페인 회화의 대표자로 파괴적이면서 지극히 주관적인 느낌과 대담한 붓 터치 등은 후세의 화가들, 특히 에두아르 마네와 파블로 피카소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처절한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일곱번 째 출산 시도 끝에 첫아들 가진 고야

1784년 12월 2일 고야의 부인은 첫아들 사비에르를 낳았다. 그의 나이 마흔 네살이었다. 아이는 이미 여섯명의 자녀를 먼저 보낸 고야 부부가 시도한 일곱 번째 출산이었다. 우리는 두 부부가 계속 임신과 출산을 시도한 사실을 주목하고 더듬어 볼 필요가 있다. 보통 둘 셋이 출산 후에 죽었다면 임신을 포기하거나 결혼 생활도 지장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관계를 계속했고 출산을 시도했다.

이런 상황에서 젊은 부부가 미쳐버리지 않는다면 아마도 정상이 아닐 것이다. 고야는 그 해 로열 아카데미의 정식 회원으로 받아들여져 화가로서 더욱 인정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가 이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고통을 36년이 지난 1820년 자신의 그림'아들을 잡아먹는사투르누스'로 표현했다. 그리스 신화의 크로노스였다. 그림 속에 흉측하고 잔인하게 묘사된 모습을 통해 우리는 고야가 자신을 학대하며 받은 처절한 고통을 들여다 볼 수 있다.

프란시스코 고야, <아들을 잡아 먹는 사투르누스>, 1819-1823. ⓒ퍼블릭 도메인. [사진 위키미디아 커먼]

프란시스코 고야, <아들을 잡아 먹는 사투르누스>, 1819-1823. ⓒ퍼블릭 도메인. [사진 위키미디아 커먼]

고야와 부인은 자신들의 1774년부터 1784년까지 10여년간 말로 표현하지 못할 불행의 시간을 정면으로 받아들인다. 일곱번의 출산시도에 낳은 아들이 또 죽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몇 년간을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보냈을 것이다.

버스 손잡이 철봉에 몸을 관통당한 프리다 칼로

멕시코 출신의 화가 프리다 칼로. ⓒ퍼블릭 도메인 [사진 위키미디아 커먼(저작자 Guillermo Kahlo)]

멕시코 출신의 화가 프리다 칼로. ⓒ퍼블릭 도메인 [사진 위키미디아 커먼(저작자 Guillermo Kahlo)]

자신의 고통을 기록한 또 한명의 작가가 있다. 바로 멕시코 출신의 화가 프리다 칼로(1907~1954). 여전히 그녀의 작품엔 아픔이 담겨 있다. 독일어로 평화를 뜻하는 ‘프리다’와 달리 그의 삶은 고통으로 얼룩졌고, 어려서부터 소외된 삶과 외움 속에 성장했다.

의사를 꿈꾸던 열여덟의 프리다 칼로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한다. 이때 버스 손잡이 철봉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고, 이 사고로 아홉 달 동안을 깁스한 채 병원에서 천장만 지켜봐야 했다. 이때 프리다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자화상이었다.

간신히 회복한 프리다 칼로는 일찍이 1910녀 멕시코 혁명 때 에밀리아노 자파타의 혁명군에게 음식을 제공해주며 응원하던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 멕시코에 망명한 쿠바 혁명가와 교분을 나누면서 그 혁명가의 애인이었던 사회주의자이자 사진작가인 티나 모도티와도 우정을 쌓는다. 그리고 티나의 소개로 멕시코의 위대한 화가이자 사회주의자이자 혁명적 미술가 디에고 리베라를 만난다.

리베라는 프리다의 그림을 보고 “잔인하지만 감각적인 관찰의 힘에 의해 더욱 빛나는 생생한 관능성이 전해진다. 나에게 이 소녀는 분명 진정한 예술가”라고 격찬한다. 그리고 스물하나의 프리다와 마흔셋의 리베라는 곧 결혼식을 올린다.

그러나 이는 프리다 자신이 얘기한 바대로 ‘버스 사고 이후의 두 번째의 대형 사고’였다. 둘은 서로 열렬히 사랑했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예술적 동료가 될 수 있었지만, 그걸 방해한 것은 리베라의 바람기였다. 언젠가 프리다는 리베라에게 이런 그림을 보낸다.

프리다 칼로, <몇 번 찔렀을 뿐>, 1935년, 돌로레스 올메도 컬렉션. [사진 허유림]

프리다 칼로, <몇 번 찔렀을 뿐>, 1935년, 돌로레스 올메도 컬렉션. [사진 허유림]

침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자신의 저고리를 피로 물들인 채 말한다. “그냥 몇 번 칼로 살짝 찔렀을 뿐입니다, 판사님. 스무 번도 안 된다고요.”

성관계 가졌던 침대를 작품으로 그린 트레이시 에민

1997년 영국의 여성작가 트레이시 에민은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이란 작품을 선보인다. ‘잤다’라는 표현에 육체적 관계를 떠올리기 쉽지만 그는 이 작품에 남자친구를 포함해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부터 가족과 친구, 심지어  낙태로 세상에 나오지 못한 아기의 이름까지 적었다.

이미 불륜관계였던 부모 밑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에민은 어머니의 애인에 의해 수차례의 성적 학대를 당한다. 13세에 강간을 당한 후 집을 나와 방황했고, 두 번의 낙태 수술과 한 번의 유산은 그를 폭음과 흡연과 심한 우울증, 그리고 자살 시도로 몰고 갔다. 그는 성폭행과 지속적인 성적 학대로 인한 상처로부터 벗어나고자 예술을 택했다.

트레이시 에민,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 [사진 허유림]

트레이시 에민,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 [사진 허유림]

트레이시 에민, <나의 침대(My Bed, 1998)>. [사진 허유림]

트레이시 에민, <나의 침대(My Bed, 1998)>. [사진 허유림]

에민은 ‘나와 함께 잤던 모든 사람들 1963-1995’ 이후 2년 만인 1998년 ‘나의 침대’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벗어 놓은 스타킹, 정리되지 않은 이불, 더러운 속옷, 담배꽁초, 보드카 병과 휴짓조각이 침대 옆에 널브러져 있다. 피임 용품, 알약, 사용된 콘돔과 임신 테스트기 등 성관계와 관련된 물건도 어지럽게 놓여있는 작품이다. 실제로 그는 저 침대에서 성관계를 가졌고 다음 날 전시회장에 그것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고야와 프리다 칼로, 그리고 트레이시 에민까지 살펴본 세 작가의 작품 속 공통 키워드는 바로 ‘자아’다. 사실 고야의 작품을 가격으로 환산하기는 쉽지 않다. 원래 고야가 자신의 집 벽에 직접 그린 그림을 고야가 사망한 후 프라도 미술관의 수석 복원가가 캔버스에 옮겼는데, 그 그림을 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히는 프라도 미술관의 관람객 수를 고려해 본다면 고야의 작품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이다.

칼로 작품 크리스티에서 91억원에 낙찰

2016년 5월 뉴욕 크리스티에서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800만 달러(한화 약 91억원)라는 낙찰가를 기록했다. 작품의 희소성에 작가의 아픔과 이를 독특하게 표현한 시각언어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성관계와 관련된 물건들에 누군가는 인상을 찌푸리거나 혹은 알몸, 관계 장면 등을 상상하며 불쾌해할 수 있는 트레이시 에민의 작품은 2014년 크리스티에서 250만 파운드(한화 약 37억원)를 기록했다. 섹스와 마약, 야만의 미가 난무하는 시대의 언어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여성작가 트레이시 에민. [사진 위키미디아 커먼(저작자 Piers Allardyce)]

영국의 여성작가 트레이시 에민. [사진 위키미디아 커먼(저작자 Piers Allardyce)]

사람들은 예술품 가격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당연한 이야기일 수 있다. 예술은 소비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이걸 안목, 눈 값이라고 말하고 싶다. 한 시대의 문화와 집단의 정신적 상징성을 갖고 끊임없이 창조적 재생산을 하는 힘을 알아보는 눈 말이다.

여기서 탄생하는 여러 가치가 바로 사회적 가치, 미학적 가치, 미술사적 가치이다. 이러한 가치를 함유한 작품성이 높은 예술품은 지역적 가치를 넘어서 인류 문화의 상징성을 갖게 되므로 더욱 가격이 오를 수밖에 없다.

오늘 소개한 작품 중 트레이시 에민의 침대는 사회적 가치를, 프리다 칼로는 자신의 미학을, 그리고 고야는 이미 미술사에 속해 그 가치를 계속 파생시키고 있다.

묘하게도 작품 가격은 독특한 시각언어가 사회적 가치를 지니는 순간 일정선을 넘어선다. 더 뻗어 나갈지는 미술계를 움직이는 세력과 작품이 지니는 잠재력에 의해 결정된다.

허유림 RP' INSTITUTE. SEOUL 대표 & 아트 컨설턴트 heryu122982@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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