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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향한 ‘면피성 꼼수’ 관둬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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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남정호
남정호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살다 보면 왕왕 ‘무늬’만 흉내 낸 가짜와 마주하게 된다. 시늉만 낼 뿐 정작 중요한 알맹이는 빼먹는 경우다. 수년 전 한 영국 외교관이 비웃으며 일러준 런던의 선정적 대중지의 행태가 딱 그랬다. 이들은 금요일 오후 4~5시쯤 외무성에 전화를 걸어 “한 해 해외 공관의 크리스마스트리 구입비가 얼마인가”와 같은 황당한 질문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자료가 있을 리 없을뿐더러 퇴근 직전, 정확한 데이터를 뽑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래서 “지금은 알려줄 수 없다”고 하면 며칠 후 ‘해외 공관, 크리스마스트리에 거액 지출, 외무성은 답변 거부’라는 기사가 1면에 실린다는 것이다. 반론도 받았다고 우기기 위한 수법이다.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란 북의 선전 #주변 열강 무시한 대북 정책은 안 돼

굳이 먼 나라 얘기를 꺼낸 건 요즘 정부의 행태가 이걸 빼닮아서다. 지난달 말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강경화 외교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격노한 해프닝이 이와 비슷하다. 그가 폭발한 건 평양 남북 정상회담 때 맺어진 군사합의서에 관해 충분한 설명과 협의가 없었던 탓이라고 한다.

외교부는 “미국과 긴밀히 협의해 왔다”고 주장한다. 얼마나 협의했는지 모르나 회담 직전, 그것도 설명이 미흡했다고 느껴졌다면 그 자체가 문제다. 형식만 갖추기 위한 면피성 꼼수란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이번뿐이 아니다. 지난해 7월 정부가 돌연 남북대화를 제의했을 때도 똑같았다. 몇 달 뒤 워싱턴에서 만난 미 국무부 내 한국 담당자는 “발표 전날 한국 측에서 일방적으로 통보해 왔다”며 흥분했었다.

이렇듯 미국은 대북 정책을 결정할 때 빼먹어도 되는 존재인가. 그럴 리 없다. 무엇보다 미국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한 축인 이해 당사국 아닌가. 세계 최강의 경제 대국 미국과 교류해야 잘살 수 있음을 김정은 정권은 잘 안다. 하여 북한의 목표는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다. 이게 우리 마음대로 될 일인가.

또 한반도 비핵화, 나아가 통일을 좌우할 중국을 다룰 수 있는 건 미국밖에 없다. 남쪽 주도의 통일 가능성이 커지면 중국이 딴지를 걸 공산이 크다. 친미 정권이 지배하는 통일 한국이 달가울 리 없다. 특히 주한미군이 압록강까지 올라오는 건 절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중국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건 미국이 유일하다. 통일을 전제로 어쩌면 미국이 주한미군을 빼는 결단을 내려야 할지도 모른다.

독일 통일에서도 미국의 역할은 결정적이었다. 1980년대 말 아버지 부시 행정부는 통일을 추구한 헬무트 콜 총리에게 동정적이었다. 그리하여 부시 대통령은 서독을 위해 여러 번 총대를 멨다. 통독을 반대하는 영국과 프랑스를 설득하고 소련을 달래기 위해 대규모 원조를 실현한 것도 그였다.

이렇게 된 데는 콜과 부시 간의 깊은 신뢰가 작용했다. 이들 관계는 부시가 부통령이었던 1983년, 서독에서 열린 한 행사에서 깊어졌다. 이 무렵 극성을 부리던 반미 시위대가 갑자기 행사장에 나타나서는 돌팔매질을 시작, 두 사람은 황급히 근처 지하주차장으로 피해야 했다. 그때 콜이 당황해하자 부시가 차분하게 “이런 일은 미국에서 흔한 일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했다는 것이다. 이에 감격한 콜은 부시에게 호감을 갖게 됐고, 4년 뒤 부시가 대통령이 되면서 이들의 우정은 더욱 돈독해져 독일 통일의 견인차 노릇을 한다.

이 정도는 아니더라도 남북 교류, 나아가 통일을 위해 정부는 미 행정부와 적극 소통하고 그들의 마음을 사야 한다. ‘통일은 우리 민족끼리’란 주장은 북한의 선전구호일 뿐이다. 주변 열강을 무시한 채 안보·통일 정책을 밀어붙이면 실패하게 돼 있다.

남정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