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사람] 소설가 한말숙씨 네 자녀에 '가상 유언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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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수의는 엄마가 준비해 둔 것을 입혀라. 장례식은 병원 영안실, 가족장으로 검소하게, 아빠의 음악을 아주 작게 들리게 해라. 찬송가.독경 다 필요 없고 영정 앞에는 헌화한 꽃만 놓아라."

문단 원로 소설가인 한말숙(韓末淑.72)씨가 격월간 문예지인 '한국문인'10~11월호에 '가상 유언장'을 실어 화제다. 가야금 연주.작곡가 황병기(黃秉冀.67)씨와의 사이에 네명의 자녀(2남2녀)를 둔 韓씨는 문단과 예술계에서 금실 좋기로 소문나 있다.

그의 유언장은 다시 이렇게 이어진다. "아빠도, 너희들도 검은 양복에 하얀 종이꽃 리본만 가슴에 달아라. 엄마의 친구 선후배들이 오실지 모르나 부의금은 절대 사절해라. 내빈의 사인장만 준비해 두어라. 장례식이 끝난 후 그 분들께 감사장을 보내라." 소위 '민폐'를 끼치지 말라는 주문이다.

韓씨는 또 "화장해서 재를 엄마가 아끼는 정원의 주목 밑에 뿌려라"면서 "만일 그것이 불법이면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소로 올라가서 중허리 쯤에 뿌려라. 그 역시 불법이면 돌 상자에 분골을 담아서 묻고, 묘비는 내가 그려서 보여준 대로 야트막하게 네모 모양으로 단단한 돌로 만들어라. 비싼 대리석 같은 것은 쓰지 마라"고 세심한 마음 쓰임새를 내비쳤다.

특히 눈길가는 대목은 "너희 아빠의 재혼은 안 된다"고 한 점이다. "아빠는 손이 안 가는 분이시니까 너희들 중 여건이 맞는 애가 아빠 가까이에서 살면 된다." 이번 유언장에서 그는 이미 써 놓은 묘비명 "평생 감사하며 살다가, 한점 미련없이 생을 마치다…"를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기일에 재래식 제사를 지내지 말고, 대신 편한 곳에서 나의 사진을 내놓고 회상하거나 함께 모여 식사를 할 것, 성묘는 1년에 한차례 하고 차례는 지내지 말 것, 성묘 때 음식은 가져가지 말 것"등도 조목조목 부탁했다.

韓씨는 서울대 언어학과를 졸업해 1957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한 이후 '어떤 죽음''노파와 고양이''장마'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전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한명인 그는 현대문학상과 한국일보 창작문학상 등을 받았다.

홍수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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