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금융산업 개편 「교통정리」에 시간 걸릴 듯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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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정부주도하의 성장위주 경제정책아래서 금융의 역할이란 당국이 설정한 실물경제의 성장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뒤치다꺼리를 하는 시녀 역이 고작이었다.
자금이 정부가 지정하는 특정산업과 특정업체에 한해서만 중점 지원됐으며 이 같은 지시가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은행장 및 임원인사에 정부가 입김을 불어넣게 마련이었다.
이 같은 상황은 자연 금융산업의 기형적 파행성을 가져왔으며 오늘날 금융산업개편논의가 거세게 일고 있는 것도 다 그 같은 배경에서다.
정부당국도 이 같은 문제의 중요성을 인식, 이미 지난 82년 금융산업발전심의회를 설치하면서부터 금융산업발전 및 개편문제를 검토해오고 있으나 추진실적은 거의 없는 상태다.
『금융당국이나 각 금융기관들이 업무영역조정을 골자로 하는 금융산업개편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면서도 일이 제대로 추진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이 문제가 금융기관간 이해와 직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이병국 조흥은행 상무)
크게는 1·2금융권간의 이해관계가 대립되고 있으며 같은 은행권이라도 시중은행과 특수은행간의 주장이 서로 다르며 제2금융권의 단자·증권·보험·투신·상호신용금고 등도 각기 제 이익에 보탬이 되는 말만 늘어놓고 있어 일이 진척되지 못하고 있다는 얘기다.
여기다 지금까지의 금융환경이나 여건이 금융기관간 경쟁을 촉발하기보다는 기존의 이익이나 나눠 먹는 것이 더 편하도록 돼 있던 것도 금융산업의 낙후성을 가져온 또 하나의 요인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 같은 소극적인 영업환경에 안주하고있을 수만은 없게 되었다. 외부에서 밀려오는 금융산업의 국제화·개방화 추세가 우선 그것을 허용치 않는다. 작년 12월 5일부터 시작된 금리자유화조치도 앞으로의 금융산업개편을 가속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할 것임에 틀림없다.
금융산업개편문제가 새해의 중요한 과제로 부각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정부당국도 이 문제에 더 이상 소극적인 자세에 머물러 있지 않을 자세다. 대출금리자유화 조치와 함께 실시된 1·2금융권간의 수신금리체계 조정에서 당국의 금융산업개편 의지는 이미 드러나고 있다.
수신금리조정 한달만에 은행수신은 2조8천억원 늘어난 반면 단자 쪽은 4천억원 이상 줄였는데 이는 지나치게 비대화한 제2금융권을 바로 잡기 위한 노력으로 풀이된다.
은행에 기업여유자금을 흡수할 수 있도록 기업자유예금 및 기업적금을 허용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같은 조치로 단자회사들의 영업환경은 전에 비해 크게 어려워지고 있으며 이 같은 여건변화는 단자회사들로 하여금 새로운 금융업무를 찾아 나서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습니다.』(허문수 서울투금사장)
결국 금융산업개편 작업은 이미 시작됐으며 다만 그 방법이 과거처럼 정부의 직접적이고 획일적인 교통정리방식 대신 간접적인 유도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관심을 끄는 것은 지난해에 이처럼 보이지 않게 시작된 개편 움직임이 올해는 어느 정도의 속도로 진행되며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이냐는 점이다.
지금까지 예고된 사실만으로도 올해 우리 금융계가 겪어야 할 변화와 풀어야 할 과제는 적지 않다. 은행권에서는 일부 특수은행의 민영화와 신설은행이 선보일 예정이다.
외환전문으로서의 특수성이 상실됨에 따라 한국외환은행이 일반은행으로 탈바꿈하게 되며 국민은행도 한전과 함께 국민주로 일반에 공개된다.
이와 함께 중소기업에 대한 금융지원을 보다 강화하지 위해 제2중소기업은행과 제2신용보증기금이 신설되며 남북한 경제교류 활성화에 따라 이북5도민은행도 연내엔 골격을 갖출 것으로 보인다.
은행권에서의 이 같은 움직임에 대해 신복영 은행감독원 부원장보는 『금리자유화조치의 본궤도진입과 함께 은행간 실질경쟁을 유발, 새 상품의 개발 등 업무영역확장이 이루어질 것이며 새로운 은행의 출현은 은행계의 고질적인 병폐인 인사적체를 크게 해소해 줄 것』이라고 다가올 변화를 전망했다.
단자업계도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특히 금리자유화와 함께 통화관리방식이 간접규제로 전환함에 따라 공개시장조작이 주요한 통화관리수단으로 등장, 콜시장에서의 전문 딜러를 요구하게 됐는데 이 업무를 따기 위한 업계내부의 경쟁이 치열해질 전망이다.
단자사들은 현재 서울에 22개(6개 종금사포함), 지방에 16개 등 모두 38개 사나 있다. 그러나 직접금융시장이 활성화되고 기업들의 내부자금 축적이 이루어짐에 따라 이들의 영업시장은 과거에 비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이에 따라 한양·한일·동아 등 3개 단자사들은 보험 쪽에 눈을 돌려 현재 정부에 생보사 설립을 신청해 놓고 있다. 일부 지방사들은 장기적으로 지방은행과의 합병이나 지방종금사로의 전환도 예상된다고 윤영전 투금협회 홍보실장은 내다봤다.
투신사 및 증권사에 대해서는 증권투자신탁업과 증권업을 분리하는 현행 체제를 유지하되 자본시장의 개방 및 증권인구의 저변확대를 위해 단자사의 업종전환에 의한 새로운 투신사의 설립이 허용돼야 할 것이라고 김시담 한은 국제금융부장은 말했다.
금융산업개편문제는 각 금융기관들이 처한 현재의 상황이 다르고 설사 같은 상황이라 해도 이해관계에 따라 보는 시각이 상반될 수 있으므로 시간을 두고 해결해 나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금융산업개편이라는 거창한 과제를 놓고 과거의 칼질과 교통정리에 맛을 들인 정부가 어느 정도 합리적인 선에서 개입의 범위를 자제하느냐는 점이다.
금융전문가들은 정부의 역할이 실물경제를 이끌 수 있을 정도로 금융산업을 발전시킨다는 차원에서 개편의 「굵은 선」만을 그어 놓는데 그치고 실제개편작업은 각 금융기관들이 금융자금의 생산적 지원이라는 공적 책임 하에 제 갈 길을 찾아나 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다는데 대체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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