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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차 케이크로 세계인 눈길 사로잡았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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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그가 태어나자마자 부모는 남남으로 갈라섰다. 숙부 집에 얹혀 살며 눈치밥 먹길 10여 년. 초등학교 5년 때 소년은 용기를 내 아버지를 찾아갔다. 하지만 새어머니 혼자 벌어 먹고사는 집에서 그는 여전히 눈치밥 신세였다. 늘 배가 고팠다. 방과 후 학교 근처 빵집 앞에 몇시간이고 쭈그려 앉아있는 버릇이 생겼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빵을 바라보기만 해도 배가 불렀다. 운좋은 날은 주인이 크림빵이며 단팥빵을 한 개씩 던져주기도 했다.

제과기능장이자 대한제과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김영모 과자점' 대표 김영모(53)씨. 서울 강남에서 20여 년간 제과점을 운영했고, 타워팰리스 주민들이 "우리 건물에 가게를 열어달라"고 모셔갔다는 일화 속 주인공인 그는 "내 평생 그렇게 맛있는 빵은 먹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버지 집을 나와 친척집을 전전하다 가출, 제빵사 보조로 취업한 17세 이후 김씨는 빵 만들기에만 매달려 왔다. 외국인들도 인정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제과.제빵 기술자가 되겠다는 꿈을 품고서.

"고생 끝에 국내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이루자 새로운 욕심이 났습니다. 몇해 전 영국의 헤롯 백화점 내 서점에 갔다가 일본의 유명한 스시(초밥) 조리사 노부의 요리책을 봤어요. 나도 영어로 책을 내 전 세계에 한국인의 제빵 솜씨를 자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

머잖아 기회가 찾아왔다. 미국내 출판사(드림캐릭터)의 제안을 받아 지난해 7월 미국에서 제과.제빵 요리책 'A collection of Fine Baking'을 출간했다. 온라인서점 아마존 닷컴의 독자 서평에서 별 다섯개를 받고, 대형 서점 반즈 앤 노블즈에서 판매고 1위의 신간으로 기록될 만큼 좋은 반응을 얻었다. 지난해 말 이 책의 한국어판인 '김영모의 행복한 빵의 세계'(기린출판사)도 펴냈다.

"처음엔 '동양인이 웬 제빵?'이라는 비아냥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한국적인 색채를 가미한 요리법이 서양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고 해요. 녹차를 이용한 시폰 케이크와 머핀, 술빵을 찌듯 와인으로 반죽한 호밀빵, 구운 고구마로 만든 케이크처럼요."

한국적인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이 책으로 김씨는 20일 요리책 분야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구어만드(Gourmand)상' 대상(디저트북 부문)을 받았다. 한국인으론 처음이다.

"디저트북 부문의 역대 수상자를 보니 프랑스의 피에르 에르메, 이탈리아의 루치아나 폴리아티, 일본의 유키 오모리 등 제과.제빵계의 거장들이 망라돼 있더군요. 가슴이 벅찼습니다. 더 흐뭇한 점은 제가 그토록 부러워했던 노부의 책도 일본 요리 부문 최종 후보에 올랐지만 대상을 받지는 못했다는 거죠."

이번 수상을 계기로 그의 책은 영어와 한국어판 외에 프랑스어.스페인어 등으로도 번역, 출간될 예정이다.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키워온 소년의 꿈이 마침내 이뤄진 것이다.

신예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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