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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동호의 직격인터뷰

한국, 자칫하면 ‘설익은 선진국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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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호 기자 중앙일보

[김동호의 직격 인터뷰]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정부는 마음을 열고 각계 의견을 받아들여 경제정책 방향을 재정립해야 한다“며 ’아직 임기가 3년 반이나 남았으니 성공한 정부가 되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은 ’정부는 마음을 열고 각계 의견을 받아들여 경제정책 방향을 재정립해야 한다“며 ’아직 임기가 3년 반이나 남았으니 성공한 정부가 되어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문재인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소득주도 성장의 폭주가 극심해지고 있다. 실업자가 8개월째 100만 명을 돌파했고, 소득격차도 최악의 상태로 치닫고 있다. ‘일자리 정부’를 자처한 정부가 취약계층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는 셈이다.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은 ‘구루(최고의 전문가)’의 통찰과 혜안이다. 길을 잃고 헤매는 소득주도 성장의 문제점을 짚고 탈출구를 모색하기 위해서다. 사공일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을 만난 이유다. 그동안 침묵을 지켰던 그는 “이 정부는 소통을 더 잘하겠다고 출범하지 않았나”라며 말문을 열었다. 그런 뒤 정교한 논리로 소득주도 성장의 문제를 조목조목 지적하고 한국경제가 나가야 할 방향을 제시했다. 사공 이사장은 “이 정부의 문제는 비단 경제뿐 아니라 각 분야에서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과정에서 전문가 의견이나 국민과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정책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가 잘 되고 실패하지 않길 바라는 충정 어린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정부 소통 더 잘하겠다고 출범 #새 정책일수록 전문가와 소통해야 #남북 경협은 한반도 차원 넘어서 #국제적 협력·지원으로 접근해야 #현재 정책은 세계경제 변화에 역행 #‘소득주도’ 정책방향 즉각 수정하고 #제대로 된 혁신성장과 시장 기능 #보완의 포용성장을 함께 해나가야

소득주도 성장을 어떻게 평가하나.
“나는 소득주도 성장이란 용어에 항상 인용구(”소득주도 성장“)를 붙인다. 이론적인 근거가 취약할 뿐 아니라 실증적으로 세계 어디서도 검증된 적이 없는 생소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득주도 성장의 목표인 일자리 창출과 고용 증대를 내걸고 중요한 정책수단으로 최저임금을 급격히 인상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정통 경제학 이론에 따르면 이런 정책은 한계근로자의 실직과 한계기업의 도산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다. 이것이 오늘날 현실이 되고 있다.”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은 “최저임금은 소득주도 성장 정책의 1%에 불과하다”고 했다.
“무엇의 1%를 말하는지 모르겠다. 원래 최저임금제는 일부 한계근로자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이다. 미국의 경우 최저임금 대상 취업자 비율은 전체 취업인구의 2.3%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율이 13.3%에 달할 뿐 아니라 음식숙박업·도소매업은 이보다 훨씬 높다. 특히 영세 자영업은 72.3%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따라서 생산성 향상 없이 급격히 최저임금을 인상하면 이런 분야의 근로자와 고용주에게 큰 피해를 주게 될 수밖에 없다.”
일자리는 민간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이다. 실제 정부가 추진하는 소득주도 성장도 결국 민간 일자리 창출을 위한 마중물 혹은 불쏘시개 역할을 하자는 것 아닌가. 문제는 현재의 정책으로는 민간기업의 일자리 창출로 연결이 되지 않는 데 있다. 따라서 일자리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우선 민간기업 투자 친화적 정책을 펴는 것이다.”
현 정부 정책은 오히려 반시장적·반기업적 정서를 만들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강조한 바 있지만, 기업인들이 위험 부담을 지며 기업하려는 ‘애니멀 스피릿(animal spirit)’은 정치·사회적 분위기에 크게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따라서 기업에 불리한 구체적 정책도 문제가 되겠지만 그러한 정책의 배경이 되는 된 반기업 정서 혹은 사회·정치적 분위기 자체가 기업 투자와 일자리 창출에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된다. 만약 하청 중소기업이나 소비자들에게 부당하고 불공정한 행위를 한다면 그런 대기업은 법과 제도로 엄중히 다스리되, 덩치가 크다는 자체를 문제 삼아 그들의 투자와 일자리 창출 기회를 막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청와대는 지표 악화에도 불구하고 “연말까지 기다려 달라”고 낙관론을 편다.
“왜 연말까지 기다리면 된다는 설득력 있는 논리로 설명돼야 한다. 적어도 어느 정도의 통계적 뒷받침도 있어야 한다. 미·중간 무역전쟁의 지속, 미국의 금리인상과 달러 강세 등에 따른 세계 경제·무역·금융 여건 변화를 고려할 때 하반기의 경제 사정이 크게 좋아질 수 있는 여건이 아니라고 본다. 따라서 하루속히 정책방향을 바로잡고 우리 경제의 기초를 다지는 일에 전력을 경주해야 한다.”
소득주도 성장이 논란을 일으키자 정부는 포용성장을 거론하고 있다.
“포용성장은 2008년 본격화된 세계 금융위기 이후 세계은행 등 국제기구를 중심으로 많은 논의가 있었고, 개념 역시 명백히 확립돼 있다. 그러나 이 개념은 어디까지나 시장경제의 실패, 예를 들면 성장의 혜택이 취약계층에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라든지, 지나친 소득의 양극화 현상을 보완해 시장경제가 지속성장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따라서 포용성장을 지향한다면서 시장 기능을 억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반면 사회 취약 계층과 한계 근로자를 위한 의료·보건·서비스 제공과 교육·훈련·재훈련 기회 등의 사회안전망은 강화해야 한다.”
J노믹스(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의 한 축으로 내세운 혁신성장은 아무런 진전이 없다.
“나는 이 정부 출범 당시 소득주도 성장과 혁신성장의 기치를 보고 그 내용은 정확히 모르지만 수요 측면의 단기 대응책과 좀 더 중장기적인 공급 측면의 상호보완적인 두 축의 정책으로 이해했다. 특히 혁신성장은 현재 빠른 속도로 진전되고 있는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필요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에 그 정책 방향이 바람직스런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소득주도 성장을 위한 정책수단이 혁신성장에 오히려 장애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라도 정부는 올바른 혁신성장을 위해 앞에서 거론한 기업 친화적 여건 조성에 정책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러한 차원에서도 방향전환이 필요하다.”
정부는 기존 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내년에 470조원의 ‘초(超)수퍼’ 예산을 짰다.
“이것은 소득주도 성장을 정확히 말하면 정부에 의한 ‘이전소득주도 성장’이며 궁극적으로 이것은 ‘국가부채주도 성장’이 될 수밖에 없다는 측면을 말해 준다고 볼 수 있다. 국민 조세부담을 계속 크게 늘릴 수도 없을 뿐 아니라, 성장 없이 세수가 늘어날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은 지속 불가능한 것이다. 아직은 우리 재정이 건전한 수준에 있으나 5년, 10년 뒤를 생각해야 한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지금이라도 정부는 불안한 국제 경제 여건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긴밀한 국제협력과 함께 단기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동시에 제4차 산업혁명 시대의 혁신성장을 위해 기존 산업화시대의 각종 제도와 규제를 개혁하는 게 시급하다. 인공지능(AI), 빅데이터 활용, 드론, 전기자동차, 핀테크 부문에 대한 정책에서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는 중국을 보며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교육·노동시장 개혁도 필요한 것 아닌가.
“제4차 산업혁명 시대가 요구하는 인력과 인재 양성을 위한 교육개혁, 가속화되고 있는 기술 변화에 따른 근로자들의 새로운 일자리로의 빈번한 이동과 적응에 도움이 될 수 있는 노동시장 유연화, 훈련·재훈련과 평생교육제도 마련과 함께 취약 근로자들을 위한 사회안전망은 강화해나가야 한다.”
우리가 개혁을 주저하면 어떻게 되나.
“우리나라는 1960~2006년 사이에 일본·스페인 등과 함께 소위 ‘중진국 함정’에 빠지지 않고 국제기구 분류상 선진국에 속하게 된 몇 개 안 되는 나라 중 하나다. 더구나 우리는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에도 들어 있다. 반면 많은 나라들, 특히 남미 국가들은 오랫동안 중진국 함정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들 대부분 나라들은 정치적 인기영합주의(포퓰리즘)에 빠져 올바른 경제정책과 제도를 마련하지 못했다. 우리도 개혁이 부진하다. 더구나 급속하게 진행되고 있는 인구 고령화·저출산 추세와 함께 저조한 기업투자·저생산성으로 성장 잠재력마저 낮은 수준에 떨어져 있다.”
위기 탈출에는 무엇이 필요한가.
“정부와 정치권은 좀 더 긴 안목의 비전을 갖고 국가발전 전략을 짜고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 자칫하면 중진국 함정을 모면한 우리나라가 ‘설익은 선진국 함정’에 매몰될 수도 있다는 점을 정치권과 정책담당자들이 명심해야 한다.”
대북 제재에도 불구하고 남북 경협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국내의 반기업 정책 와중에 남북 경협에 기업의 역할을 기대할 수 있나.
“남북간 문제는 비단 한반도에 국한된 우리만의 문제가 아니고, 적어도 지역 내지 글로벌 차원의 이슈인 만큼 주요 국제기구 및 주요국들과의 긴밀한 협력과 지원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우리의 지정학적 위치와 미·중간 패권 다툼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우리보다 여건이 좋았던 독일도 영국 ·프랑스의 노골적인 반대를 달래고 주변 열강을 설득해 통일을 이뤘다. 통일과 경협은 우리만의 힘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사공일은 …

국내 최고의 경제 석학으로 꼽힌다. 서울대 상과대학을 졸업한 뒤 미국 UCLA에서 경제학 석·박사를 취득한 뒤 역대 정부에서 핵심 정책을 집행하고 조언했다. 1983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을 시작으로 87년부터 재무부 장관을 두 번 역임했다. 93년에는 올해 25주년을 맞이한 세계경제연구원을 설립했다. 이를 통해 세계적 석학과 전문가, 주요국의 정책 담당자들을 초청해 그들의 생각을 국내에 알리는 일을 하고 있다. 국가경쟁력강화위원장·G20정상회의준비위원장·한국무역협회장을 차례로 맡아 한국 경제 발전의 고비마다 중요한 역할을 했다.

김동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