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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장세정의 시선

문재인·시진핑·차베스의 ‘과속 스캔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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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장세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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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사람들은 인육(人肉)을 먹었다. 이런 행위는 1958년 여름 기근이 시작된 윈난 성에서 나타났다. 1960년 마을 주민 20명 중 한 명꼴로 사망한 어느 인민공사(人民公社·집단농장)에서는 여러 명의 아이들이 먹혔다.”

불평등 해소한다며 분배 정책실험 서두르다 재앙 초래 #이상주의에 사로잡힌 정책 대수술하고 민생 살려야

네덜란드 출신의 중국 현대사 연구가인 프랑크 디쾨터가 쓴 『마오의 대기근』(열린책들)의 일부다. 그는 중국공산당 내부 문서를 근거로 대약진 운동(1958~1960년) 기간에 식인(食人)이라는 극단적 비극이 벌어진 참담한 장면을 생생하게 표현했다.

루쉰(魯迅)이 중국 최초의 현대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에서 유교 전통을 비판하기 위해 비유적으로 묘사한 봉건시대의 식인 행태가 불과 60년 전 사회주의 신중국에서 자행됐던 것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최대 4000만 명이 굶어 죽은 대약진 운동이 사실은 최고 지도자인 마오쩌둥의 경제정책 실험 실패에 따른 정치적 인재(人災)였다는 점이다. 1949년 공산 혁명에 성공하자 마오는 자신감이 넘쳤다. 혁명의 여세를 몰아 서구 자본주의 제국인 영국과 미국을 각각 7년과 10년 안에 따라잡고 모두가 평등해지는 공산주의 이상사회를 서둘러 실현하려고 무리수를 뒀다. 마오의 조급증과 과욕은 디쾨터 박사가 묘사한 대참사를 초래했다.

마오의 급진적 시행착오가 최근 중국에서 반복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팽배하고 있다. 시진핑 주석 집권 이후 중국에서 마오 시대를 닮아가는 과속 징후가 곳곳에 보인다. 마오의 극좌 문화대혁명 노선의 오류를 반성하면서 1978년 시작된 개혁·개방이 올해 40주년을 맞았는데, 요즘 중국이 개혁·개방에 역행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덩샤오핑이 도광양회(韜光養晦·때를 기다리며 실력을 기름)의 겸손한 자세를 견지하도록 주문했는데 시진핑은 도광양회에서 벗어나 분발유위(奮發有爲·떨쳐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한다)와 강국몽(强國夢)을 대놓고 외친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2013년 시진핑이 시작한 일대일로(一帶一路) 신실크로드 구상은 요즘 관련 68개 국가 중 16개 국가에서 역풍에 직면했다. 위안화를 무기로 약소국들의 인프라를 가로채는 ‘약탈적 부채 외교’가 벌어지면서 ‘중국식 제국주의’라는 비판을 받는다.

6개월째 계속되는 미·중 ‘무역 전쟁’도 중국이 성급하게 머리를 내밀다 총을 맞는 양상이다.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중국은 WTO 체제 덕분에 엄청난 이익을 챙겼지만, 트럼프라는 ‘복병’을 만나 호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중국 지도부의 이런 과속 배경에는 어용학자들의 곡학아세가 한몫했다. 대표적 관변 학자인 칭화대 후안강(胡鞍鋼) 교수는 지난해 “중국이 경제·과학기술·종합국력 면에선 미국을 이미 추월했다”고 떠벌렸다. 하지만 그의 ‘수퍼 차이나’ 주장은 “국가 정책과 국민을 오도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리샤오(李曉) 지린(吉林)대 경제·금융대학원장은 지난 6월 졸업식에서 “중국경제가 지난 40년간 큰 성취를 거두면서 거국적으로 자부심이 생겼고 동시에 맹목적으로 우쭐대기 시작했다”고 비판했다. 그는 “중국은 미국의 정치·경제 구조변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지 않아서 트럼프 대통령을 과소평가했고 미국을 잘못 판단했다”며 “감정이 아니라 이성적으로, 겸손하게 미국 연구를 제대로 해야 한다 ”고 촉구했다. 냉철한 지식인이 던진 자성의 목소리가 지금 중국사회에서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이런 가운데 요즘 베네수엘라도 지구촌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다. 세계 5위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는 우고 차베스 대통령 집권 기간(1999~2013년)에 석유 수출로 번 엄청난 국부를 무상 교육과 무상 의료 등 포퓰리즘 정책에 펑펑 지출했다. 처음엔 빈민층이 열광했으나 유가 폭락과 미국의 제재가 겹치면서 경제가 파탄 났다. 이 때문에 50여만 명이 난민으로 전락해 비참하게 국외를 떠돌고 있다.

이런 반면교사 사례를 요즘 대한민국이 닮아간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소득 불균형 문제를 풀겠다고 최저임금을 단기간에 급격히 인상하고, 저녁이 있는 삶을 살게 해준다며 노동시간을 인위적으로 대폭 단축했다. 적게 일하고도 많이 벌 수 있다면 유토피아가 따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순진한 이상주의자들의 생각과 달리 선한 동기는 경제 현실에서 정반대의 결과를 낳고 있다. 비정규직을 비롯한 한국판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들이 일자리에서 먼저 쫓겨나고 있다. 한계상황에 내몰린 소상공인들은 “더는 못 살겠다”며 29일 광화문에서 대규모 궐기대회를 예고하고 있다. 산소가 고갈되는 ‘잠수함 속 카나리아’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다. 정책 실험의 대상이 된 서민들이 아우성치는데 정책 대수술을 미루고 “첫눈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한다면 그야말로 고문이다.

1961년 소련 핵잠수함의 폭발 위기를 다룬 영화 ‘K-19 (과부 제조기·Widow maker)’를 보면 리더십의 중요함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독선과 억지를 부리는 리더는 부하들을 죽음으로 몰아가지만, 유연하고 실용적인 리더는 3차 대전이 발발할 수도 있었던 위기를 극적으로 피하고 부하들을 살려낸다. 어떤 지도자가 될 것인가.

장세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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