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기고] 낭만주먹 낭만인생 42. 간첩죄 구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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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1974년 간첩죄로 구속된 필자의 감방 동료들은 이른바 '문인·지식인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소설가 이호철·임헌영씨 등이었다. 사진은 당시 사건을 다룬 중앙일보 지면.

"손 들어!"

갑자기 들이닥친 검은 색 가죽 점퍼 차림의 사내 두 명이 권총부터 들이댔다. 1974년 1월 중순 서울의 내 동생집에서 일어난 일이다. 노나메기 농장 시작 직후 결혼했던 내 아내가 만삭이라 몸을 풀게 하려고 서울의 동생집을 찾았을 때였다.

"야 임마. 털 데가 없어서 가난뱅이를 터냐?"

나는 그들을 대낮 강도로 착각했다. 굳은 표정의 그들은 신분증을 제시했다. 기관원들이었다. 말인즉슨 나를 잡으러 강원도까지 갔다가 허탕친 뒤 여기까지 추적해왔다는 것이다. 뻥한 표정으로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간첩죄로 구속됐다.

내 삶의 하이라이트인 노나메기 농장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났다. 농장을 시작한 지 1년이 채 안 된 때였다. 신혼과 이상촌 건설의 꿈이 산산조각 난 채 압송돼 간 곳은 대구의 대공분실. 방동규란 위인은 함석헌.장준하.백기완 등 반체제 인사들과 교류가 많은 요주의 인물이니 사람 눈을 덜 타는 곳으로 일부러 빼돌렸다는 말을 나중에야 들었다.

"김일성과 무전 교신을 할 때 사용했던 암호를 대라."

"정부 전복용 게릴라 무기는 어디에 감췄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그들은 연신 몽둥이 찜질에 전기고문을 해댔다. 그런 얼 빠진 고생을 15일이나 한 뒤 서대문교도소로 옮겨졌다. 푸른 수의에 '350', 평생 못 잊을 수인번호를 달았다. 6개월 수감 중 5개월을 독방에 집어넣은 걸 보면 중죄인이었던 모양이다. 하루 한 번 운동(햇볕보기)도 없었던 최악의 생활이었다.

도대체 웬 간첩죄 구속이었을까. 혹시 내가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에 간여했기 때문일까? 사실 73년 12월 장준하.백기완은 허술(전 중앙일보 기자).이부영(전 동아일보 기자), 그리고 나를 은밀히 불러들였다. 장준하의 면목동 집에서였다. 그들은 등사기를 밀어 개헌청원서 초안을 제작하고, 나는 허술.이부영과 함께 집 주변을 감시했다.

음양으로 재야 세력을 돕던 활동이 체크됐을까? 그 직후인 74년 1월 박정희 정부는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긴급조치 1, 2호를 내렸는데, 정부 대 반독재의 고래싸움에 내가 덜컥 끼어버린 격일까? 아니었다.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직접적으로는 안이만의 입이 문제였다.

안이만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순진했다. 무턱대고 국회의원보다 내가 더 훌륭하다고 생각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그에게는 우리가 나눴던 반독재.농촌운동 같은 말이 소화불량의 언어였다. 안이만이 잠시 시골에 다니러 갔다가 그런 얘기를 동네방네에 떠벌였다.

그의 사촌형이 무릎을 쳤다. 그리고 덜렁 신고했다. 배추란 위인이 반체제 내지 빨갱이라고 굳세게 믿었던 것이다. 아뿔싸, 육군하사 출신의 그는 충실하게 반공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수사기관까지 나를 거물로 착각했다. 외딴 곳에서 수상한 농사를 짓지, 반체제 인사들이 줄줄이 집으로 찾아들지….

배추 방동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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