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우리만 먼저 움직일 일 절대 없어” 험난한 비핵화 여정 예고

중앙일보

입력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4일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기념촬영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오른쪽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  [연합뉴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이 4일 싱가포르 엑스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기념촬영 뒤 자리로 향하고 있다. 오른쪽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 [연합뉴스]

남ㆍ북ㆍ미 외교장관이 함께 모였던 싱가포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북한이 험난한 비핵화 여정을 예고했다. 이용호 북한 외무상은 4일(현지시간) 오후 ARF 연설에서 “미국이 건설적인 방안을 갖고 나온다면 상응하게 무엇인가를 해줄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미국이 우리의 우려를 가셔줄 확고한 용의를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는 한 우리만 일방적으로 먼저 움직이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가 언급한 ‘우려 해소’는 그간 북한이 주장해온 종전선언을 비롯한 체제 안전보장으로 풀이된다.

ARF는 북한이 참여하는 유일한 역내 다자 안보 협의체다. 남북, 북ㆍ미가 자연스럽게 조우하며 타협 가능성을 타진할 수 있는 자리다. 이 외무상은 이 자리에서 “(싱가포르 북ㆍ미 정상회담) 공동성명의 모든 조항들을 균형적으로, 동시적으로, 단계적으로 이행해 나가는 새로운 방식만이 성공할 수 있는 유일하게 현실적인 방도”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미군 유해를 송환했으니 미국도 이에 걸맞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조치에 나서라는 이른바 ‘동시적ㆍ단계적 접근법’이다.

이 외무상은 이날 “미국에서는 조선반도 평화 보장의 초보의 초보적 조치인 종전선언 문제에서까지 후퇴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며 종전선언을 직접 거론했다. 이 외무상은 전날인 3일 만찬 행사 때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조우했을 때도 종전선언을 언급했다. 강 장관은 5일 브리핑에서 “(이 외무상과) 종전선언에 대해서도 의견 교환이 있었다.(이 외무상의) 공개 발언을 보시면 내용을 유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 장관은 이와 관련 연내 종전선언에 대해 “계속 협의를 하고 있으며, 이번에 미국ㆍ중국과도 상당한 협의가 있었다”고 소개했다. 강 장관은 다음달 말 열리는 유엔총회가 종전선언 기회가 될지에 대해 “유엔총회를 중요한 계기로 본다”면서도 “총회를 넘어 다른 중요한 계기들이 있다. 그 전후로 해서 상황에 맞춰 종전선언을 연내에 이루겠다는 목표를 우리가 지속적으로 밝히고 있고, 주요 협의 대상국도 이를 잘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면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이 외무상 연설에 앞선 4일 오전 기자회견에서 “‘최종적이고 완전하게 비핵화한 북한’이라는 목표를 손상하는 어떤 위반도 미국은 심각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국제 사회에 경고장을 냈다. 대북 제재 전선에서 이탈하지 말라는 얘기다. 이 외무상의 연설 때 폼페이오 장관은 다른 양자회담 일정 때문인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고 한다.

단 북ㆍ미는 대화의 동력을 이어간다는 제스쳐를 교환했다. 4일 ARF 회의장에서 폼페이오 장관이 먼저 이 외무상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리고 악수를 청하자 이 외무상도 웃으며 반기는 모습을 노출했다. 성김 주필리핀 미국대사는 이날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보내는 친서를 이 외무상에게 전달했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5일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등 아세안 관련 외교장관회의 결산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5일 싱가포르의 한 호텔에서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등 아세안 관련 외교장관회의 결산 브리핑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이 외무상은 ARF에서 11개국과 양자회담을 하면서도 강경화 장관, 폼페이오 장관과의 공식 회담은 거부했다. 강 장관이 이 외무상을 3일 만찬장에서 만났을 때 이 외무상은 “(북한은) 기본적으로 외교당국이 나설 때가 아니라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이는 남북 외교장관 회담을 거절한 이유에 대한 답변이었다. 북한에서 그간 핵협상을 담당해온 것은 외무성이다. 이 외무상이 지금은 외교당국이 나설 때가 아니라고 한 것은 북한이 아직 비핵화 협상을 본궤도에 올릴 뜻이 없다는 의미로 읽힌다. 싱가포르=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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