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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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민주화란 것이 하다 보니 되거나 걱당히 해서 되는 것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래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어느덧 민주화가 돼있더라고 할수 있으면 그보다 좋은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민주화가 그런식으로는 안 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확고한 추진세력이 확고한 추진계획을 갖고 민주화를 추진해도 40년 권위주의의제도·사람·의식·기득권세력들을 극복·청산하고 민주화를 이룩하자면 수많은 도전과 시련을 이겨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민주화는 확고한 세력과 확고한 계획에 의해 추진되고 있는 것인가.
6공들어 국회·정부·정당 할 것 없이 너도 나도 민주화를 내세우고 단숨에 민주화를 해낼 것처럼 8개월을 보냈지만 지금 돌아가는 형편을 보면 누가 어떤 계획에 의해 민주화를 추진하고 있는지도 알수없을 지경이다.
모두들 그럭저럭 하다보면 민주화가 될 것으로 믿는지 정부나 정당들은 모두 인기품목에만 매달리고 있을뿐 어느 측도 중심을 잡고 계획을 세워 민주화개혁을 추진하는 것 같지도 않고 그런 의도가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정부·여당은 민주화를 말하지만 마지못해 하는 듯한 자세가 역력하고 말로는 하면서도 실천은 따르지 않는다. 정부·여당으로서는 민주화가 곧 기득권의 상실이고 권한의 축수소요, 일을 어렵게, 수고를 더 들게 하는 것이 뻔한 터에 적극적으로 나설리가 없다.
민주화보다는 흑자무역이 대견하고 북방외교와 정상외교에 더 신이 나있는 것이 분뎡하다. 여권의 집안끼리 모이는·관계부처회의 같은데서는 『보안법을 왜 고쳐』 『그런친구를 어떻게 풀어줘』 라는 등의 매파의 목소리가 여전히 강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저 시절의 대세에 밀려 언론에 간섭을 못하고 야당의 목소리를 안들을 수는 없게됐지만 정부·여당 스스로 민주화의 의지와 실천계획을 갖고 움직이는지는 의심스런 형편이다.
대통령이 손수 가방을 들고, 저녁9시뉴스의 톱을 장식하지도 않고, 외국에 나갈때 사람들을 길가에 내세우지도 않는 것은 분명 민주화에 접근하는 스타일이지만 그것으로 민주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야당도 5공 비리 척결이란 대목을 맞아 신나고 바쁜 탓인지 민주화추진이란 본류의 문제는 잊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때가 많다. 5공 비리 청산 없이 민주화가 묄 수 없지만 비리청산만이 민주화의 전부도 아니요, 청산해야 할 5공 청산의 전부도 아니다. 그런데도 야당은 자기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는 국회를 통해 몇달씩 5공 비리에만 매달리고 있을뿐 민주화의 기본이 될제도나 법률의 개폐나 새로운 입법에는 손도 못대고 있다.
자기들이 과거 그 법으로 그토록고 통받고 개정을 외쳐온 집시법 하나도 여태 고치지 못해 아직도 이법으로 잡혀가는 시민이 있다. 법을 고치고 만드는 사람이 누군데의원이 대정부질문을 통해 악법을
언제까지 고치겠느냐고 정부측에 따진 일도 있었다.
야당은 민주화를 추진한다고 하면서도 실은 가장 큰 관심은 집권경쟁에 있는듯이 보인다. 야대국회에서 야당끼리 손발만 맞춘다면시원시원한 민주화의 실적을 올릴수도있을텐데상호경쟁·견제에더바쁜 것같다. 집시법이나 사회안전법하나 고치지 않고 있으면서도 그때 그때 여론의·관심에 따라 서로 질세라 양심수석방특별입법안을두당이 다투어 내놓는가 하면 특뎔검사제 입법안도 경쟁적으로 발표한다.
어느 야당도 탄탄한 계획과 추진력으로 민주화를 추진하려는 자세가 아니라 인기품목을 좇아 급조정책을 내놓는다. 본회의가 열리는동안 취약지역을 찾아 강연을 하는 야당총재를 보면 야당의 가장큰 관심사가 역시 집권경쟁임을 손쉽게 느끼게 된다.
5공비리의 청산이 민주화도정의부가결한 한 과정이고 야당이 당연히 열을 올릴 일이지만 민주화추진의 전체계획의 일부로서 비리청산작업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어느당이 이름을 더 날리고 인기를 누가 더 얻느냐는 경갱이 앞을 가리면 비리청산작업마저도 제대로 되기가 어려워진다.
이처럼 정부도 여당도 야당도 민주화추진의 확고한 전략도 자세도갖고있는것 같지 않다. 그래서 우리의 민주화는 화려한 말의 성찬과는 달리 일정한 방향타 없이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형국이 아닌가 싶다.
떠내려가면서도 민주화가 잘되기만 한다면야 좋겠지만 그러다가어느 세월에 어떤 내용의 민주화를 하게 될지, 민주화가 정말 되긴될지 아무런 보장이 없다. 한때의분위기나 한때의 여론에 따라 민주화가 이리 쏠리고 저리 쏠려서도 안되고, 국회나 정치인들이 틈이 나야 민주화가 진전을 보게 된대서도 말이 안된다.
따지고 보면 민주화까지는 노정권이나 3야당이나 같은 편일수도있다. 수구세력·극단세력을 제압하고 국민적 합의의 바탕외에 민주화개혁을 추진하는 것은 노정권이사는 길이자 야당이 추구할 길이다. 집권경쟁은 그다음 단계의 일이다. 그런데도 어느 측도 이런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도 노력도 부족한게 현실이 아닌가 한다.
민주화는 하다 보니 되는 것일 수도 없고 마지못해 할 일도 아니다. 지금부터라도 정부와 정치권은 민주화추진의 새로운 자세정립이 있어야 할 것이다. 노 대통령은 가방을들고 다니기만 할게 아니라 이제는 그 가방을 열 때가 됐고, 야당은 종합적인 민주화전략에 힘을 모아야 한다. 떠내려가는 민주화를 더이상 방치할 수는 없다.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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