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철이가 민주화 운동 3년 했다면 아버지는 30년 하다 가셨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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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일 검찰총장이 28일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빈소를 찾아 누나 은숙씨의 손을 맞잡고 위로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문무일 검찰총장이 28일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빈소를 찾아 누나 은숙씨의 손을 맞잡고 위로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종철이가 민주화 운동을 3년 했다면 아버지는 30년 하시다 가셨죠.”

‘민주화의 아버지’ 박정기씨 노환으로 별세 #행안부 장관·경찰청장 등 정·관계 조문 잇따라

28일 고(故)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89)씨 빈소에서 만난 박 열사의 누나 은숙(56)씨가 떨리는 목소리로 한 말이다. 지난해 초 척추 골절로 수술을 받고 부산 수영구 남천동의 한 요양병원에 입원해 1년 6개월간 투병하던 박씨는 이날 오전 5시 48분쯤 89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누나 은숙 씨는 “아버지는 종철이가 죽은 1987년 이후 30년간 민주화 관련 집회에 끊임없이 참석하면서 종철이의 명예회복과 민주화를 위해 한평생 살았다”며 고개를 떨궜다.

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빈소를 찾은 민갑룡 경찰청장이 조문을 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빈소를 찾은 민갑룡 경찰청장이 조문을 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박씨의 장례식은 시민사회 단체가 주도하는 민주시민장으로 치러진다. 박씨는 오는 31일 오전 7시 부산 금정구 부산영락공원에서 화장된 뒤 장지인 경기도 남양주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된다. 박씨는 박 열사 묘지 옆에 나란히 묻힐 예정이다.

박 열사의 죽음은 평범했던 가족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박씨는 전국 민족민주유가족협회장을 10년간 맡으며 민주화 운동의 희생양이 된 가족들을 대변했다. 은숙씨도 1987년 이후 5년간 각종 집회와 시위를 쫓아다니며 동생이 죽게 된 과정을 밝히려 했다. 하지만 새로 밝혀낸 사실은 하나도 없다.

박 열사는 1987년 1월 14일 서울대 ‘민주화 추진위원회’ 소속 수배자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치안본부의 남영동 대공분실에 강제로 끌려가 고문을 받다 사망했다. 박 열사 부검의 증언과 후속 조사 결과 고문치사였음이 드러나면서 1987년 6월 민주 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문무일 검찰총장이 지난 3월 20일 오후 부산 수영구의 한 요양병원을 찾아 고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 씨의 손을 잡으며 검찰의 과거사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다. [뉴시스]

문무일 검찰총장이 지난 3월 20일 오후 부산 수영구의 한 요양병원을 찾아 고 박종철 열사의 부친 박정기 씨의 손을 잡으며 검찰의 과거사에 대해 사과를 하고 있다. [뉴시스]

박 열사의 형 종부(60)씨는“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자식의 명예회복이다”며 “국회 계류 중인 ‘민주 유공자법’이 빨리 통과돼 종철이의 명예회복이 이뤄지는 것을 아버지가 보지 못하고 돌아가신 것이 너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어 종부씨는 “국가폭력이 자행됐던 남영동 대공분실을 민주인권기념관으로 바꾸는 작업이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며 “인권기념관이 하루빨리 조성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박씨의 빈소에는 정·관계 인사 등의 조문이 잇따랐다. 문무일 검찰총장은 이날 오후 6시 40분쯤 빈소를 찾았다. 문 총장은 지난 3월 20일 박씨가 입원한 요양병원을 찾아 31년 만에 검찰의 잘못된 과거사를 사과한 데 이어 박씨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지난 20일 요양병원을 찾는 등 세 차례 병문안했다.

문 총장은 “박종철 열사는 민주주의를 가져다줬고, 아버지 박정기씨는 민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평생 노력해왔다”며 “검찰의 과거 잘못을 성찰해서 수평적 민주주의를 구현하는 데 힘쓰겠다”고 말했다. 문 총장은 참모들과 저녁 식사를 하며 장례식장에 한 시간가량 머물렀다.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왼쪽 두번째)이 고 박종철 열사의 누나 은숙씨(왼쪽 세번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은지 기자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왼쪽 두번째)이 고 박종철 열사의 누나 은숙씨(왼쪽 세번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은지 기자

앞서 이날 오후 3시쯤 빈소를 찾은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은 누나 은숙 씨와 30분가량 대화를 나누며 추억을 회고했다. 김 장관은“아버지 박씨는 아들의 죽음을 개인의 아픔으로 끝내지 않고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지도록 했다”며 “민주화의 아버지로 한평생 희생한 고인의 삶에 존경을 표한다”고 말했다.

지난 24일 취임한 민갑룡 경찰청장은 이날 오후 4시 10분쯤 빈소를 방문했다. 민 청장은 “경찰에 의해 소중한 자식을 잃은 아버지가 한평생 아파하다 돌아가신 점을 경찰로서 죄송하게 생각한다”며 “아버지의 헌신을 경찰도 받아들여 민주·인권·민생 경찰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민 청장은 조문 방명록에 ‘평생을 자식 잃은 한으로 살아오셨을 고인에 대해 속죄하는 마음으로, 고인이 평생 바라셨던 민주, 인권, 민생 경찰로 거듭나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이날 6시 30분쯤 빈소를 찾은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민주주의를 지켜주신 아버지를 국민의 이름으로 애도한다”며 “아프게 보냈던 아들 곁에서 영면하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

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빈소를 찾은 민갑룡 경찰청장(왼쪽 앞쪽) 등이 유족을 위로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고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 빈소를 찾은 민갑룡 경찰청장(왼쪽 앞쪽) 등이 유족을 위로하고 있다. 이은지 기자

부산=이은지 기자 lee.eunji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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