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낮은 청와대’ 약속하지 않았나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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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4호 34면

청와대가 조직 개편으로 비서관을 늘리고, 부처들의 홍보·정책 통제를 강화했다. 물론 예산도 늘렸다. 취지 자체엔 일리가 있다.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으로 반발이 큰 자영업자 문제를 전담할 자영업비서관을 신설했다. 부처들의 정책 조정과 중·장기적 기획 기능에 주목한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 문제는 조직과 인원이 늘면 청와대가 제 2내각이 되는 ‘청와대 정부’ 현상엔 힘이 붙고, 당연시된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아도 ‘청와대 독주로 부처는 보이지 않는다’는 우려가 넘치는 내각이다. 북한 핵과 최저임금 등 주요 경제정책은 말할 것도 없다. 시시콜콜한 사안까지 청와대가 주도권을 쥐고 좌지우지하는 게 현실이다. 부처 틀어쥔 걸 마치 국정을 잘하는 것인 양 여기는 풍토까지 더해져 ‘내각 패싱’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출범 당시 ‘청와대가 부처를 장악하지 않겠다’던 임종석 비서실장의 다짐과는 거리가 먼 풍경이다.

현안마다 청와대만 바라보는 식이라면 공직 사회는 복지부동하게 마련이다. 또 부처가 효율적으로 일하려면 장관들이 지휘해야 하는데 청와대가 일일이 간섭하면 장관 설 자리란 없다. 박근혜 정부의 국정농단이 그렇게 시작됐다. ‘받아쓰기 내각’은 제왕적 대통령의 불행을 방조하는 역할에 그쳤다. 문재인 대통령의 ‘낮은 청와대’ 다짐은 그런 병폐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청와대는 옥상옥으로 군림하지 않고, 정부 부처가 헌법상의 권한과 기능을 다 하게 하겠다는 뜻이다.

역대 모든 정권이 출범할 때는 작은 청와대를 내세웠지만 예외 없이 비대해졌다. 청와대 비서실 규모는 분권 의지가 강했던 노무현 대통령 때 가장 컸다. 지금 청와대는 노 정부 이후 최고다. 백악관보다도 100여 명이나 많다. 내각이 청와대의 하청업체 역할에만 머문다면 정부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이제라도 장관에게 정책과 인사권을 실질적으로 맡겨야 한다. 문 대통령 자신이 분권 의지와 권력 위임을 행동으로 보이는 수밖에 없다. 책임 총리와 내각 위주의 국정 운영을 거듭 약속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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