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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와 동아시아 지도자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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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비스마르크를 시기하던 젊은 황제 카이저는 즉위 2년 만인 1890년 비스마르크를 해임하고 특유의 좌충우돌 식 외교를 주도했다. 해군 경쟁으로 영국을 적국으로 만든 데 이어 비스마르크가 공들여 만든 외교망을 무너뜨려 러시아.프랑스 양국이 급속히 대독 견제에 나서게 했다. 해외순방 때마다 돌출발언을 계속해 "카이저는 풍선 같으니 꼭 붙잡고 있지 않으면 어디로 날아갈지 모른다"는 우려가 이어졌다. 카이저의 도발적 외교와 군비증강은 결국 영.프.러 3국 모두의 경계심을 부추겨 3국협상(1907년)을 출범하게 했다. 독일 스스로를 주변국들로부터 고립시키면서 포위되게 만드는 '자살골 외교'를 펼쳤던 것이다.

이 독일 외교사의 교훈은 최근 동아시아 지역정세를 분석하는 기준으로도 자주 거론돼 왔다. 런던 국제전략문제연구소 계간지를 중심으로 과연 카이저 식 외교를 추구하는 나라가 중국인지 미국인지를 놓고 논란이 일어왔다. 그러나 요즘 동아시아 상황을 보면 거의 모든 나라가 분별없는 대외정책을 펴 온 것으로 보인다.

사실 비스마르크 식 외교전략은 1990년대 중반 뉴욕 외교협회 등을 중심으로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으로 건의돼 온 방식이다. 한.일 양국과 긴밀한 동맹을 유지하는 한편 중국과의 전략적 대화를 지속해 미국이 '정직한 중재자'(Honest Broker) 역할을 맡아가야 한다는 건의였다. 그러나 최근 부시 외교에서는 그런 주도면밀함을 찾아보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라크 전쟁 와중에 대안도 없으면서 북한을 '악의 축'으로 규정해 수년간을 허송했다. 중국과의 전략적 대화보다는 대중 포위망 형성에 집중하면서 '중재자'로서의 역할은 훼손된 상태다.

일본의 고이즈미 정권은 한.중 양국 등 이웃에 기대를 걸기보다는 미.일 관계만을 강화하면서 자위대의 군사활동 영역을 동아시아의 주변지역으로 확대해 왔다. 그러면서 과거사 문제 등으로 인근 국가들의 대일 경계심을 거침없이 자극하고 있다.

노무현 정권의 경우 초기의 운동권 정서를 담은 발언들은 자칫 '외교적 부도상태'를 초래할 정도였다. 최근에는 시기상조라는 우려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부터 전시 작전통제권 환수를 서두르고 있다. 남북관계를 지나치게 낙관하면서 섣부른 중립화를 추진하고 있지 않으냐는 인식을 심고 있다.

대만의 천수이볜 정권은 중국 측의 잇따른 전쟁 경고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추진하겠다는 노선이다. 민주화 이후 신세대 여론의 지지를 업고 있는 이 노선은 양안관계의 현상유지 속에 평화를 원하는 미.중 양국을 모두 곤혹스럽게 만들어 왔다. 중국 역시 급속한 경제발전 속에 분출하는 정치 에너지를 흡수하는 구심점으로 중화 민족주의를 활용하고 있고, 에너지자원 확보를 위해 주변 해역에서 영토분쟁도 불사하겠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왜 이처럼 복잡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을까. 냉전 이후 긴박한 안보위협이 줄어들면서 각국 국민이 대외정책상의 경륜보다는 국내 이슈에서의 인기에 따라 지도자를 뽑은 결과다. 그래서 대외정책의 성공에 필수적인 절제와 신중함보다는 국내 분위기가 대외정책을 주도하고 있다. 다른 나라 사정은 어쩔 수 없다 해도 통일이라는 과제까지 안고 있는 한국의 경우 카이저 식 외교 혼선을 허용할 여지는 더욱 줄어들고 있다.

김승영 영국 애버딘대 교수.국제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