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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축구’와 사무라이들의 변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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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서승욱 기자 중앙일보 정치국제외교안보디렉터
서승욱 일본지사장

서승욱 일본지사장

“친구는 이따위 경기는 보기 싫다며 채널을 돌렸다. 그리고 콜롬비아와 싸우는 세네갈을 응원했다. 나는 일본이 16강 진출을 위해 확률 높은 선택을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10년 이상 알고 지낸 그와 처음으로 크게 다퉜다.”

1일 일본 후지TV 와이드 쇼에 출연한 아이돌 출신 배우가 소개한 에피소드다.

토크의 주제는 ‘산책 축구’라는 혹평이 쏟아진 러시아 월드컵 조별리그 일본 대 폴란드전(한국시간 6월 28일 밤)이었다. 콜롬비아가 1대0으로 세네갈을 앞섰고, 일본은 폴란드에 1대0으로 뒤진 상황.

세네갈이 동점골을 넣으면 탈락하는 위험 속에서도 일본은 후반 막판 10분여간 산책하듯 한가하게 외곽에서 공을 빙빙 돌렸다. 관중들의 야유가 쏟아지는 가운데 일본은 세네갈보다 옐로카드가 적어 ‘페어플레이 포인트’로 16강행에 성공했다. 페어플레이 포인트를 비신사적인 ‘산책 축구’로 적립한 희대의 역설이었다.

“친구는 비신사적인 일본 대신 세네갈을 응원했다”고 말한 배우는 어쩌면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친구 입을 통해 했을지도 모르겠다. 무조건 일본팀을 감싸는 분위기에 대놓고 산책 축구를 비판하긴 어려웠을 테니까.

필자를 가장 당황하게 한 건 일본 언론의 태도였다. 언론들은 세네갈전에서 두 차례나 극적인 동점을 만들었던 일본 대표팀을 “사무라이는 포기하지 않는다”고 치켜세웠다.

하지만 그 언론들이 사무라이들의 산책 축구엔 눈을 감았다. 우익이나 보수지는 그렇다 쳐도 ‘일본의 양심’이란 신문의 29일 자 석간 기사도 거기서 거기였다.

“결과가 전부다. 감독의 훌륭한 지휘였다”(혼다 게이스케), “보는 사람들은 답답했겠지만 이게 축구다”(하세베 마코토)라는 선수들의 변명, 그리고 “승부사의 고뇌 끝 한 수, 선수가 이해했고, 운도 도왔다. 그래서 열매를 맺었다”는 기자의 평가로 기사는 끝을 맺었다.

TV에 출연한 해설가는 베스트셀러 『미움받을 용기』를 본떠 “움직이지 않을 용기”라고 일본팀을 변호했다.

“월드컵을 오염시켰다”는 혹평이 전 세계에서 쏟아지자 일본 언론들은 그제서야 비판론과 옹호론을 맞세워 ‘양시양비론’으로 물을 탔다.

될 수 있으면 일본의 시각으로 바라도 보고 이해하려 노력하는 편이지만 이번엔 아찔한 기분이었다.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불을 붙이면 가치판단이나 제동장치 없이 열도 전체가 한 방향으로 달려갈 듯한 위험성이랄까. 그 질주에 경고음을 울려야 하는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이유다. 하긴 그게 어디 일본에만 적용되는 얘기겠느냐만.

서승욱 일본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