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었던 올림픽 정신 되찾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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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나의 두 번째 서울올림픽얘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영국 「킬러닌」경의 얼굴을 떠올린다. 「사마란치」에 앞서 IOC를 8년간 이끌었던 그는 소박함으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값비싼 호텔방안에 머무르기보다 땀 냄새가 물씬 나는 선수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했던 노인이었다. 1주일 전쯤 선수촌에서 나는 선수들에게 둘러싸인 「킬러닌」경을 보았다.
그는 세계각국으로부터 몰려든 젊은이들에게 조용하지만 분명한 어조로 얘기하고 있었다. 『두 차례 심장질환을 이겨내고 이곳 서울의 가을하늘아래 서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모스크바와 LA에서 잃어버렸던 올림픽정신을 우리는 여기서 되찾고 있다. 동과 서에서 온 선수들의 건강한 웃음 속에서 나는 올림픽을 보고있다.』
나는 「킬러닌」경의 그 말을 깊이 새겼고 베오그라드에 있는 독자들에게 전해주기 위해 타이프를 두들겼다.
3일 후 잠실스타디움의 스탠드에 앉아 있었던 나는 그 노인네가 느낀 생의 진득진득한 감격을 공유할 수 있었다.
한국인들은 미국선수들에게 보냈던 박수를 똑같이 소련선수들에게도 아낌없이 쏟아주고 있었다. 물론 내 조국 유고도 따뜻한 박수를 받았고….
그것을 단지 「북방정책」의 파장으로 해석하기를 나는 거부한다. 또한 한국인들이 KAL기 참사를 잊었다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그것은 올림픽이란 이름아래서 가능한 일이었다.
미국의 LA체조요정 「매리·루·레튼」을 기억하는 한국인들이 「옐레나·슈슈노바」를 잊을 리 없지 않은가.
나는 소련의 무명여자사격선수 「이리나·칠로바」가 서울올림픽의 첫 금메달을 목에 걸었을 때 중앙일보 1면에 대문짝만 하게 실렸던 그녀의 사진을 기억한다.
앳된 얼굴에 가득했던 해맑은 미소. 불가리아의 미녀사격선수「베셀라·레체바」를 찍느라 정신이 없었던 한국의 사진기자들은 잽싸게(?) 「칠로바」의 미소를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스타디움의 스탠드에서 내가 낚아 올린 또 다른 수확은 「한국적 자유」와 만난 것이었다.
서울은 개막식에 있어 내가 지금까지 목격한 6개 도시와는 다른 분위기를 보여 주였다.
그것은 개최국의 「색깔」과 「냄새」가 풍부하게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둥둥둥』 울리는 한국의 전통북소리(개막식 행사에 북이 사용된 것은 처음)는 마음을 야릇하게 흥분시켰고 전통의상을 입은 무용수들의 춤과 어우러져 독특함을 자아냈다.
잔디밭 위에 펼쳐진 개회식메뉴는 마치 한국고유의 잔칫상 같았다. 매콤한 김치에다 꿀에 찍어먹는 달콤한 인절미, 씹을수록 맛이 나는 고기 산적 등…. 그것은 한국적 다양함이고 자유며 조화였다.
내가 지켜본 여타의 올림픽개회식에선 이만큼의 다양함은 찾아보기 힘들었기 때문에 「잠실」은 내게 소중한 경험이었다.
모스크바의 레닌 스타디움에서 사람들의 동작은 마치 병사와도 같았다. 절도는 있었으나 따뜻함이 없었고 구성이 자로 잰 듯 치밀했으나 뜨거움이 없었다.
잠실벌의 사모아인을 보았는가. 내리 쏟아지는 가을 햇살아래서 마음껏 육체를 자연 그대로 드러낸 채 당당히 입장하던 그 모습. 메달을 따는 것도 중요하지만 올림픽은 「자기」를 보여주는 것이고 여러「자기」가 한데 어우러져 공존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닌가.
성화릴레이를 「한국인의 것」으로만 하기에는 너무 아깝다.
사람들의 눈빛이 전쟁의 징조를 띠고 있었던 52년 전의 베를린에서 42.19km를 제일먼저 달려낸 손기정옹이 냉전시대가 사라져 가는 지금 서울에서 성화를 들고 달렸다.
한국인들에게 그는 국민적 영웅이고 세계인에게 그는 역사의 일부분이다.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는 역사의 연결은 이곳 서울에서도 중요하지만 나의 조국 유고에서도 중요하고 나아가 세계인들에게도 영원한 과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앳된 소녀에게 전달된 성화라는 역사는 우리 모두의 것이고 세명의 한국젊은이들에 의해 우리의 미래를 향해 타올랐던 것이다.
스탠드에 앉아있었던 내가 사용할 수 있는 어휘란 어찌 보면 추상적일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손옹이 성화를 움켜쥐고 트랙을 돌 때 각국선수들이 성화에 좀더 다가가려고 몸을 움직이는 것을 보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은 벌써 트랙에 가있었으니까.
서울올림픽을 준비한 사람들은 일단 선수들의 가슴속에, TV를 시청한 수십억 세계인들의 가슴속에 있는 「올림픽」이란 감선을 자극하는데 성공했다.
지금 선수들은 경기장으로 몰려들고 있고 사람들의 눈과 귀는 그들의 선전에 쏠려 있다.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우리는 많은「칠로바」를 만나게될 것이고 또한 눈물을 삼키는 「레체바」를 보게될 것이다.
그들의 목에 메달이 있건 없건 우리는 그들의 땀 냄새에서 진실을 발견할 것이다. 「킬러닌」경이 그토록 좋아했던 땀 냄새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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