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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리의 출산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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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지난해 10월 취임한 저신다 아던(38) 뉴질랜드 총리는 이 나라의 최연소 총리이자 세계 최연소 여성 수반이다. 뉴질랜드의 역대 세 번째 여성 총리인 그가 21일 3.31㎏의 건강한 딸을 낳았다. 현직 여성 총리의 출산은 뉴질랜드에서도 처음이다. 세계적으로 국가 지도자의 출산은 1990년 당시 37세였던 베나지르 부토 파키스탄 총리가 딸을 낳은 이후 아던이 두 번째다.

지난해 총리 취임 6일 전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된 아던은 올해 1월 인스타그램에 이 사실을 공개했다. 아이의 아빠는 사실혼 관계에 있는 방송인 클라크 게이퍼드다. 언론에서는 그저 ‘파트너’라고 표현한다. 아던은 “진통이 시작될 때까지 일하겠다”며 출산 직전까지 만삭의 몸으로 총리직을 수행했다. 병원에 갈 때조차 총리의 특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민영 병원이 아닌 남들처럼 공공병원으로 향했고, 앰뷸런스가 아닌 개인 승용차로 이동했다. 운전은 그의 파트너가 했다. 출산 소식도 SNS에 공개했다. 그는 “새로운 부모들이 겪는 모든 감정을 우리도 겪을 것으로 확신한다”고 밝혔다. 출산 사흘 뒤 병원을 떠난 아던 총리는 역시 ‘남들처럼’ 6주간의 출산휴가에 들어갔다. 총리직은 윈스턴 피터스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이 대행한다. 육아는 파트너인 게이퍼드가 ‘전업 아빠’로 집에 머물며 전담할 것이라고 한다.

아던은 지난 1월 임신 사실을 공개하면서 “(많은 여성처럼) 자신도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직장여성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총리의 출산과 육아가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님을 강조한 것이다. 아던은 지난해 6월 야당이던 노동당 대표 취임 직후 방송 인터뷰에서 고용주가 여직원의 출산 계획을 알아야 한다는 취지의 질문에 “수용할 수 없다. 임신 시기는 전적으로 여성이 결정할 일이고, 그것이 여성 일자리에 영향을 줘서도 안 된다”고 반박해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아던의 정치적 멘토이자 1999년부터 10년간 뉴질랜드를 이끌었던 헬렌 클라크 전 총리는 아던의 출산과 남성 파트너의 전업 육아를 “21세기 성평등의 역할 모델”이라고 평가했다. 여성이 최고의 일을 하면서 엄마가 될 수 있음을, 좋은 직장에 다니는 남성도 집에서 육아에 전념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다.

현직 여성 국회의원의 임신·출산이 화제가 되고 ‘결혼=출산’이라는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가 강해 미혼모 자녀나 혼외자는 ‘비정상’으로 차별당하는 한국에서 뉴질랜드 총리 스토리는 신선한 충격이다. 인구 450만 명의 소국 뉴질랜드가 일·육아 병행의 모범을 보여줬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