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외교 구각을 벗을 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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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방일중인 김영삼 민주당총재는 주말을 이용, 지난 20일 동경 우에노 (상야) 공원에 있는 왕인 박사 기념비를 찾아 기념식수를 했다.
백제시대 선진문화를 일본에 전수했던 왕인 박사의 기념비는 당당하게 자리하고 있었으나 비의 내력·왕인을 설명하는 별도의 안내문 표지는 없었다. 심지어 우에노 공원내부 60여가지 잡다한 시설물·기념물이 적힌 안내 팸플릿에도 왕인비는 빠져있었다.
김총재는 『왕인 박사는 한일 고대문화 교류사에서 우리의 자존심이며 중요한 몫을 했는데 기념비가 너무 소홀히 취급되고 있다』면서 『이런 것이 넓게 보면 한일간의 「왜곡된 동반자관계」의 단면』 이라고 지적했다.
김총재는 그러면서 이날 아침 기자간담회에서 강조한 양국간의 「기형적 유착관계의 청산」의 의미를 상기시켰다.
그는 한일관계가 본질문제가 가려진 채 외형상부피만 비대해진 기묘한 형태를 유지해 왔다고 지적했다. 65년 국교정상화당시 불완전한 식민지지배의 청산이 23년이 지난 오늘의 양국 국민감정에 깊은 골을 만들어 놓고있다고 했다.
『역대 군사정권이 양국관계에서 저지른 잘못들이 「식민지시대의 완전한 청산」이라는 차원에서 재검토돼야 한다』 면서 민주화시대를 맞아 제2의 국교정상화가 필요하다고 진단했다.
그의 평가를 빌지 않더라도 양국관계, 특히 과거 양국 외교는 정상적인 채널에 의존하기 보다 막후의 심부에서 중요한 대목들이 이뤄졌으며 밀실에 익숙했고 심취했었다. 박정희 정권은 물론 전두환 정권의 대일 외교도 사적파이프라인이 중요한 구실을 했다.
그러다 보니 한 정권이 퇴진했을 때 정상채널을 제쳐놓고 새로운 채널을 구축하기에 분주했다.
지난번 민정당 공천에서 5공화국 대일 외교막후 창구였던 권익현 전 의원이 탈락했을 때 일본측은 파이프라인의 폐쇄를 아쉬워했다고 한다.
김 총재의 지적대로 양국외교의 정형은 확실히 새롭게 정립돼야할 시점에 온 것 같다. 정부·여당 쪽은 청구권협상이래 막후에 의존하려는 관습과 양태에서 벗어나야 하며 야당도 어줍잖은 사적채널로 일본정계에 접근하려는 스타일에서 탈피해야한다.
정부·여당 그리고 야당 측의 대일 외교형태가 제자리를 굳힐 때 전체외교 역량의 수준이 높아질 것이며 그런 것들이 왕인 박사 기념비의 초라함을 벗겨주는 시기를 앞 당겨 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경에서><박보균·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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