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말이 더 편한 여든의 김일성 독일어 통역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3면

북한 김일성 주석이 독일 골조시를 방문해 시장과 악수하고 있다. 왼쪽이 통역을 맡았던 헬가 피히트. [사진 베를린 반제국주의플랫폼]

북한 김일성 주석이 독일 골조시를 방문해 시장과 악수하고 있다. 왼쪽이 통역을 맡았던 헬가 피히트. [사진 베를린 반제국주의플랫폼]

“나는 6월 12일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헬가 피히트 전 독일 훔볼트대 교수 #김일성대 수학 … 10여 차례 통역 #“김영남은 오랜 친구, 북미회담 기대”

헬가 피히트 전 독일 훔볼트대 교수는 올해 84살이다. 남편과 사별한 그는 독일 베를린 근교에 살고 있다. 30일(현지시간) 전화 인터뷰에서 그는 어려운 단어를 말할 때 뜸 들이긴 했지만 유창한 한국어를 썼다. 정확히는 북한 말이다. 남한을 ‘한국’으로, 북한을 ‘이북’이나 ‘조선’으로 불렀다.

1954년 훔볼트대에 처음 생긴 한국학 전공의 첫 입학생이자 졸업생인 피히트 교수는 북한 김일성 전 주석의 독일어 통역을 10여 차례 담당했다. 평양 주재 동독 대사관이 나무로 만든 임시 거처를 쓰던 55년, 그는 처음 북한을 방문했다. 전쟁의 폐허를 보고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2차 대전의 참혹함을 떠올린 그의 인생은 이후 한반도를 맴돌았다.

60년 김일성대에서 수학하며 한국어를 배웠다. 동독 인사들이 북한을 찾을 때 통역을 하다 외교관이 됐다. 86년 에리히 호네커 동독 공산당 서기장이 북한을 방문했을 때 그가 김 주석과의 통역을 맡았다. 김 주석의 독일 방문 때도 통역은 그의 몫이었다. 김 주석은 그에게 “북한 남성과 결혼해 한국인에 대해 더 배워보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미 배우자가 있던 피히트 교수는 “언어보다 한국인 자체를 모른다는 내 약점을 꿰뚫어 봤을지 모른다”고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말했다.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에서 발표하고 있는 피히트 교수. [사진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에서 발표하고 있는 피히트 교수. [사진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

지난 판문점 남북정상회담을 TV로 지켜보던 그는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내 오래된 친구가 아직도 저기 있네”라고 읊조렸다. 피히트 교수는 오른쪽 몸에 부분 마비가 왔다고 밝히면서도 “어제 저녁에도 한국 관련 토론회를 다녀왔다”며 “8월에도 역사학자들 앞에서 발표할 예정”이라고 소개했다.

연이은 남북정상회담에 대해 그는 “남북 지도자가 만나는 것은 정말 좋은 일이다. 지속된다면 새로운 문을 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평창겨울올림픽 개막식 중계를 봤지만 독일어로 통역이 되지 않아 피히트 교수는 문재인 대통령의 개막식 연설을 한국 지인을 통해 받아봤다고 한다. 피히트 교수는 “문 대통령의 연설이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며 “그 연설문을 독일어로 번역해 학자 등에게 나눠주고 있다”고 말했다.

북미정상회담이 우여곡절 끝에 개최될 전망인 것과 관련해 그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요구를 자꾸 내놓는 것은 좋지 않아 보인다”며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회담을 열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영리하게 대응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김정일 시대에는 미국 부시 행정부와 평화를 위한 회담이 계속되지 못했는데 지금은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이번 기회에 북한이 실제로 변화할 수 있을 것 같냐는 질문에 피히트 교수는 “김일성 주석이 평화협정을 만들자는 제의를 많이 발표해서 내가 평양 주재 독일대사관에 있을 때 번역도 하고 논문도 쓴 적이 있다”며 “이미 91년 북한 연형묵 총리가 서울에 가 아주 훌륭한 공동성명(남북기본합의서)을 만들었기 때문에 최근 움직임은 아주 좋은 신호”라고 강조했다. 92년 대학에서 사임한 뒤 그는 박완서의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윤정모의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 박경리의 『토지』를 번역했다.

런던=김성탁 특파원 sunty@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