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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업인 줄 알았는데 … 중국회사 채권 투자했다 날벼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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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중국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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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일 한국 증권가는 한 중국 에너지 회사의 ‘부도’ 소식에 화들짝 놀랐다. 중국의 에너지 유통회사 중궈궈추능위엔화공(中國國儲能源化工)그룹㈜ 산하 자회사가 갑작스럽게 3억5000만 달러(약 3800억원) 규모 채권을 갚지 못해 부도를 선언하면서다. 자회사의 부도는 중궈궈추능위엔화공그룹이 보증한 다른 채권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한국에선 특수목적법인(SPC)인 ‘금정제12차’가 이 중국 기업이 보증한 채권을 기초자산으로 자산유동화기업어음(ABCP) 1650억원어치를 발행했는데, 이 ABCP마저 부도 위기에 몰린 것이다. ABCP란 채권·부동산 등을 담보로 발행하는 기업어음이다. 투자자들은 담보 자산의 안전성을 믿고 이자 수익을 얻기 위해 이런 상품에 투자하지만, 담보 자산이 부도를 내면 투자한 돈을 모두 떼이게 된다. 이혁준 나이스신용평가 금융평가본부장은 “금정제12차가 발행한 어음의 부도 위험이 커졌다”며 “증권사별 최종 손실 규모는 아직은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회사채 시장 ‘차이나 리스크’ 경보 #베이징시 지원 가능성 있어도 #국유자산관리위 등록 안되면 헛일 #나이스·서울신용평가 ‘우량’ 분류 #중국 에너지기업 자회사 부도 #국내 증권사들 1000억 이상 손실

한국 회사채 시장에 ‘차이나 리스크’ 경고음이 울리고 있다. 수천억원대 손실을 보게 된 증권사들은 사실상 중국 정부나 마찬가지인 중국 베이징(北京)시의 지원 가능성이 인정되는 기업인데도 부도가 났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기업이 자금이 부족해 부도가 나는 데도 지원할 줄로만 알았던 중국 지방 정부는 ‘나 몰라라’ 식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도 직전에 놓인 중국 기업 채권이 국내 신용평가사로부터 우량 등급(A급)을 받아 시장에 유통된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국내 시장에 유통된 ABCP 물량이 어느 정도인지도 파악조차 안 되고 있다.

한 회사채 전문가는 “부도 위험이 높은 채권이 우량 등급 채권으로 둔갑해 시장에 버젓이 유통되고 있는 것은 시장 내 신용위험 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직접 등급을 매긴 나이스신용평가와 서울신용평가 등 국내 신평사들은 이번 사태의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됐다. 이들은 이 중국 기업을 베이징(北京)시의 지원 가능성이 인정된다는 점, 중화인민공화국 회사법에 따라 설립된 점 등을 들어 ‘공기업’으로 분류했다. 공기업은 현금이 고갈돼도 정부가 지원해주기 때문에 우량 등급으로 매긴 것이다. 그러나 이는 국내 신평사가 중국의 공기업 분류 기준을 제대로 알지 못한 ‘부실 평가’란 지적도 나오고 있다. 중국은 정부 지분이 있는 기업이라도 국유자산관리위원회에 등록돼 있지 않으면 공기업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중궈궈추능위엔화공그룹의 경우 이 위원회에 등록돼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우량 등급만 믿고 투자했다가 손실을 떠안게 된 증권사들은 비상이다. 관련 업계에 따르면 문제가 된 ABCP에 현대차투자증권 500억원, BNK투자증권 200억원, KB증권 200억원, 유안타증권 150억원, 신영증권 100억원 등 수천억원 규모의 투자가 이뤄졌다. 특히 현대차투자증권은 지난해 벌어들인 순이익(589억원)과 맞먹는 부실 ABCP를 떠안고 있다.

이 때문에 피해 증권사와 고위험 ABCP를 발행한 주간사(한화투자증권·이베스트투자증권), 그리고 신평사 간 갈등도 커지고 있다. 한 피해 증권사 관계자는 “해당 ABCP 발행 3일 만에 부도가 났는데 발행을 주간한 증권사가 이런 징후를 몰랐다면 직무 유기, 알았다면 사기극”이라고 언성을 높였다.

문제는 이 같은 부도 직전 중국 기업 채권을 담보로 발행한 ABCP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김원택 금감원 구조화증권팀장은 “금융당국은 자산유동화에 관한 법률에 따라 발행된 자산유동화증권(ABS)만을 집계할 뿐, 상법상 발행되는 ABCP는 별도로 집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중국 정부가 국영기업, 공기업 효율화에 나서면서 이런 일은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재 ABCP는 규제의 사각지대가 돼 있다”며 “부도 가능성이 큰 중국 채권이 ABCP로 포장돼 판매되고 있다면, 당국이 이를 모니터링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김도년·조현숙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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