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달 12일 북ㆍ미정상회담을 앞두고 개최지인 싱가포르에선 미국과 북한이 28일부터 경호ㆍ의전 등에 대한 사전 실무협상에 들어갔다. 익명을 요구한 전직 청와대 당국자는 “사전 실무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항 중 하나가 도청 염려없이 본국과 통신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하는 것”이라며 “북한으로선 최고 지도자의 사상 첫 서방권 순방인 만큼 경호 못지않게 통신을 집중적으로 점검할 것으로 보이다”고 말했다.
특히 북한이 통신과 관련해 ‘핵가방’을 챙길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핵가방은 유사시 핵무기 사용 명령을 내릴 수 있는 통신장치를 뜻한다. 가방 안에 핵무기 사용 명령의 적정성을 입증할 수 있는 암호책과 비화기(암호통신장치) 등이 들어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북한은 체제 수호의 핵심 수단인 핵 통제 체제를 싱가포르로 가져가 미국 앞에서 핵무력 완성을 과시할 수 있다”며 “암호화 기술과 위성통신망에 한계가 있지만 상용 위성전화기로 핵가방의 비화기와 비슷한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북한과 같은 독재국가에선 군 통수권과 핵무기 발사 권한을 다른 누구에게 이임하지 않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항상 지녀야하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가방의 존재를 밝힌 적은 없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핵 위기가 한창인 1월 1일 신년사에서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있다”고 언급했다. 박휘락 국민대학교 정치대학원장은 “핵 단추는 수사적 표현이며, 자신이 명령을 내리면 즉시 핵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통제 체계가 있다고 자랑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통제 체계를 휴대용으로 만든 게 핵가방이다.
김 위원장이 핵가방과 함께 회담장에 입장하면 북ㆍ미정상회담이 북한의 비핵화 협상이 아니라 북ㆍ미간 핵군축 협상으로 비쳐지는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게 신 센터장의 분석이다.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 공사는 14일 “향후 북한 비핵화는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ingㆍ완전한 비핵화)가 아닌 SVID(Sufficient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ingㆍ충분한 비핵화), 핵 위협을 감소시키는 핵 군축으로 갈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고 말했다. 박 원장은 “핵가방까지는 아니더라도 북한은 싱가포르에서 핵무기를 통제하는 수행원과 통신수단을 은근히 드러내는 방법을 고민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북한의 핵가방은 트럼프 미 대통령을 자극할 수 있는 너무 위험한 카드”(김진형 전 합참 전력부장)라는 의견도 있다.
핵가방의 시초는 미국이다. 미국은 1950년대부터 무게 20㎏의 핵가방을 운용했다. 미국 대통령이 가는 곳엔 언제나 ‘뉴클리어 풋볼’이라는 별명의 핵가방을 들고 있는 장교가 따라다닌다. 지난해 11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미국의 핵가방을 회의장에 반입하는 문제를 놓고 미국과 중국이 몸싸움을 벌인 적도 있었다.
러시아도 옛 소련 시절이었던 1983년 핵가방을 만들었다. 러시아의 핵가방은 미제 ‘샘소나이트’ 제품이라고 한다. 러시아 대통령 취임식 때 전임과 신임 대통령이 핵가방을 주고 받는 의식을 치른다.
중국의 핵가방은 베일에 가렸다. 김태호 한림국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중국은 시진핑 국가주석이 중앙군사위원회 주석 자격으로 핵무기를 직접 통제한다”며 “핵가방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이철재 기자, 박용한 군사안보연구소 연구위원 seajay@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