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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떠나지 못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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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윤정민 기자 중앙일보 기자
윤정민 산업부 기자

윤정민 산업부 기자

친구들과 여행을 가려고 했다.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었지만 제주도 한번 못 갔다. 시간이 넘치던 대학 땐 돈이 없었다. 졸업해도 취업을 못 하면, 역시 돈이 없었다. 운 좋게 일자리를 구한 친구는 시간을 못 냈다. 겨우 여행 얘기를 꺼낸 건 졸업 후 5년 정도가 지나서다. 다들 조금이나마 사정이 나아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는 떠나지 못했다.

친구 A는 백수다. 공부를 더 하고 교수도 되고 싶다며 대학원에 갔지만, 교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되는 게 아니란 사실만 배웠다. 꿈을 포기했지만, 문학을 전공한 늦깎이 취준생을 받아주는 회사를 찾지 못했다. 다시 교육대학원에 가기로 했다. 지금은 일주일에 나흘씩 과외를 해 학비를 번다.

B는 힘들게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지난해 사직서를 냈다. 맞은편에 앉아 괴로워하는 부장을 보다 퇴직을 결심했다. 죽도록 일해도 달라질 게 없을 것 같았다. 대기업은 적지 않은 월급을 줬지만, 다른 모든 걸 빼앗았다고 했다. 퇴직금을 긁어모아 작은 책방을 차렸다. 어떤 날은 손님 2명이 전부고, 그나마 없을 때도 있다.

C는 직장인이다. 대외적으론 비교적 젊고 자유로운 이미지를 가진 회사에 다닌다. 그러나 C는 주 2일 정도만 일찍 퇴근한다. 토요일과 일요일이다. 평일엔 자정을 넘기는 일이 흔하고, 상사의 술 시중을 들다 새벽을 맞는 날도 적지 않다.

D는 공무원이다. 3년 전 D가 합격했을 때, 우린 부러워했다. 공무원은 빨간 날 무조건 쉬고 6시면 칼퇴근하는 줄 알아서였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리 다섯은 술만 마시면 여행 얘기를 했다. 당장 떠날 것처럼. 하지만 술에서 깨면 통장 잔고와 직장 상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결국 여행은 포기했다. A는 과외를 빼기 어려웠고, 생활비도 부족했다. 사람처럼 살겠다며 회사를 떠난 B도 월세 내면 빈털터리였다. C는 월말엔 매출 결산 때문에, 월초엔 기획서 때문에 휴가를 낼 수 없었다. 게다가 최근엔 팀장 심기가 불편해 아무도 휴가 얘기를 못 꺼낸다고 했다. D는 갑자기 시청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한달짜리 교육이 잡혔다. 다들 일이 산더미라 대신 갈 사람도 없다고 했다.

A가 취업을 하거나 시험에 합격하면 C나 D가 되고, C가 직장생활을 못 견뎌 그만두면 A나 B가 되며, B가 가난에 지쳐 재취업을 준비하면 A가 되고, 취업에 성공하면 다시 C가 된다. 우리가 다 같이 여행을 떠나려면 A~D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돼야 하지만, 내가 아는 우리 또래 대부분은 A~D 사이의 어디쯤에서 살고 있다. 특별히 게으르거나 잘못해서 그런 건 아니다. 단지, 현실이 그렇다.

윤정민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