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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비추는 빛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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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성시윤
성시윤 기자 중앙일보 기자
성시윤 교육팀장

성시윤 교육팀장

휴가차 모처럼 찾은 제주도엔 7일 온종일 비가 내렸다. 한라산 동편 비탈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1131번 도로는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안개가 하도 짙어 전방 50여m 앞서 가는 차가 있는지 없는지도 알 수 없었다. 목전의 교차로 신호등조차 식별되지 않았다. 신호등에 가까이 다가서야 현재 신호가 녹색인지, 적색인지 분간됐다.

이런 날씨엔 주변 자동차가 켜 놓은 전조등·차폭등과 비상등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앞차의 비상등 덕분에 길의 굴곡을 가늠할 수 있다. 앞뒤에서 가는 차가 함께 등을 켜지 않는다면 추돌사고 위험은 매우 커진다. 전조등과 비상등을 켜는 것은 나의 안전을 지키는 동시에 남을 보호하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교통안전공단이 지난 2012년 조사해 보니 비가 오는 날 전조등을 켜는 차는 전체 차 중 34.7%에 그쳤다.

‘비가 오는 날 전조등을 켜야 한다’는 것을 개인적으론 20여 년 전 운전면허시험을 보며 배웠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한다’고 실감한 것은 십수 년밖에 되지 않는다. 일부 국가에선 대낮 주행 중에도 전조등 점등을 법규로 의무화한 이유를 공감하지 못했다. 국내에서 한낮에 전조등을 켠 채 주행 중인 차를 옆 차로에서 발견하면 정지 신호 때 그 사실을 해당 운전자에게 알려주기도 했다. 실수로 켰나 싶어서였다.

다른 차의 전조등이 ‘나를 비추는 빛’임을 실감한 것은 십수 년 전 그날 밤이었다. 차에 시동을 건 후 1시간여 전조등을 켜지 않은 채 운전한 것을, 운전을 마치고서 주차하는 순간 알게 됐다. 당시 시속 70~80㎞의 서울 올림픽대로를 질주한 직후였다. 나 자신은 물론 다른 운전자에게도 치명적 사고를 초래할 뻔했다.

어떻게 전조등을 켜지 않은 것을 1시간 동안 몰랐을까. 다른 운전자들이 켜 놓은 불빛에 의존해 운전했기 때문이다. 나의 ‘무감각’을 자책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후론 대낮에도 전조등을 켜고 운전하는 게 습관이 됐다. 좌회전 혹은 우회전을 하기에 앞서 방향지시등을 켜고, 교차로 회전 시엔 바닥에 그려진 차량 유도선을 넘지 않는 것도 그날 이후 더욱 지키려고 노력하게 됐다.

가족과 가정의 의미를 되새기는 5월. 가족이 아닌 ‘남’의 고마움도 함께 떠올렸으면 한다. 우리는 ‘나를 비추는 빛’에 의지해 매 순간 살고 있다. 그 빛은 내가 켜지 않은 불에서 나올 때가 훨씬 많다. 불을 켠 이는 옆 차로의 운전자일 수도 있고, 우리가 발 뻗고 잠잘 때 수고하는 군인·경찰·소방관일 수 있다. 혹은 간절히 기다리던 물품을 배달해 준 택배기사일 수 있으며, 우리 가족이 대표나 임원을 맡은 회사의 평범한 직원일 수 있다.

성시윤 교육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