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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콩회항’ 데칼코마니 되는 조현민 사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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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주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문병주 사회 부데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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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현실이 됐다.

지난 1월 13일 서울 광화문 세종대로 구간에서 평창 겨울올림픽 성화를 손에 든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뒤편에서 환하게 웃으며 달리는 조현아(44)씨와 조현민(35)씨 모습이 시작이었다. 겨울올림픽이 폐막한 지 한 달쯤 지나 보도자료가 배포됐다. ‘풍부한 호텔 경영 경험을 바탕으로 호텔 관련 업무를 총괄하게 될 것’이란 내용이었다. 2014년 12월 미국 뉴욕 JFK공항에서 출발하려는 대한항공 여객기 안에서 기내 서비스를 문제 삼아 이륙하려던 비행기를 되돌려 승무원을 내리게 한 ‘땅콩회항’의 주인공 현아씨의 복귀 선언이었다. JFK공항에서의 사건으로 구속기소돼 143일을 구치소에서 지내고, 2년간의 재판 끝에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을 확정 선고받은 지 3달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조사 및 수사기관, 재판정에 드나들며 “진심으로 사과드린다”며 카메라 앞에서 고개를 숙였던 그의 모습보다는 동생 현민씨가 그에게 보낸 ‘반드시 복수하겠어’라는 문자가 진정성이 있었다고 믿게 됐다. 대한항공 직원들은 대부분 말이 없었다.

곧 대한항공 전무였던 현민씨의 광고대행사 직원에 대한 갑질 사건이 이슈화됐다. 초기 양상은 땅콩회항 때와 비슷했다. 여론이 악화되자 ‘#나를 찾지 마’라는 메시지를 남기며 해외 휴가를 떠났던 현민씨는 급히 귀국해 사과의 말을 전했다. 현아·현민 자매는 현직에서 모두 배제됐다.

하지만 직원들이 달라졌다. 땅콩회항 이후 팀장급 사무장에서 일반 사무장이 돼 소송까지 진행하고 있는 박창진씨 등 일부 당사자들의 일로만 치부됐다. 조 회장 일가족 폭행·폭언은 물론 밀수와 해외재산 은닉 등 수많은 제보가 쏟아졌다. 폭행 의혹 사건을 맡은 경찰은 물론 관세청·국토교통부·공정거래위원회와 같은 국가기관을 움직였다. 가면까지 쓰고 촛불을 들고 나서는 모습을 보면 직원들의 결기가 느껴진다. ‘승진에서 누락될 것이다’ ‘밥줄이 끊길 수도 있다’는 불안감도 이들은 이겨낸 것 같다.

이런 가운데서도 또 다른 ‘상상’이 떠오르고 있다. 강도와 시간만 다를 뿐 3년4개월이 걸린 땅콩회항 사건의 데칼코마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구체적인 제보에도 “그런 일은 없다”거나 “법적으로 따져보겠다”고 응대하는 총수 일가의 모습 때문이다. 뒤늦게 텅 비워진 총수 일가의 ‘비밀의 방’을 찾아냈다거나 “각종 서류가 파쇄됐다”는 제보 후에서야 비리 관련 서류를 찾겠다고 분주히 움직이는 수사기관의 모습은 현실화의 가능성을 키우고 있다.

이 상상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 총수 일가로 향한 대한항공 직원들을 비롯한 ‘을’들의 분노가 방향을 틀 수 있다.

문병주 사회 부데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