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가습기 살균제 제조사 뒷북 고발 … 사명 바뀐지도 몰랐던 공정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02면

하남현 경제부 기자

하남현 경제부 기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지난달 12일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한 재조사 결과를 발표하면서 “공정위가 그동안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라며 “통렬히 반성한다”라고 사과했다. 과거 공정위가 사건을 부실 처리한 데 대한 것이다.

작년 말 SK케미칼 두 회사로 분할 #사실 파악 못해 SK디스커버리 누락 #허송세월 하는 새 공소시효 곧 만료 #말 뿐인 사과보다 재발 방지책 절실

이 사건과 관련해 김 위원장은 다시 고개를 숙여야 했다. 지난달 27일 국회 정무위원회 업무보고에 참석한 자리에서다. 그는 “정말 변명의 여지가 없는 오류였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왜 또다시 같은 사건에 대해 사과해야 했을까?

사정은 이렇다. 공정위는 지난달 12일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하면서 표시광고법을 위반한 혐의로 SK케미칼을 검찰에 고발했다. SK케미칼이 2002~2013년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판매하는 과정에서 독성물질이 포함된 사실을 제품 라벨에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 혐의가 드러나서다. 소비자들이 유해성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가습기 살균제를 사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검찰 조사 과정에서 오류가 발견됐다. 옛 SK케미칼이 지난해 12월 SK디스커버리와 SK케미칼로 분할됐는데 공정위는 이를 전혀 알지 못했다. 분할에 따라 SK케미칼을 통제하는 SK디스커버리도 당연히 고발 대상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공정위는 분할에 따른 사명 변경 사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고발장에서 SK디스커버리를 누락했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SK케미칼이 법인 분할 사실을 알리지 않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라고 해명했다. SK케미칼에 책임을 떠넘긴 셈인데, SK케미칼이 공정위에 이를 따로 알려야 할 의무는 없다. 더구나 공정위는 대기업집단의 지배구조를 감시하는 기관이다. 당연히 대기업 집단의 분할 및 합병 행위 등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대기업 정책의 주무 부처가 공시나 언론 보도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진 사안도 제대로 챙기지 못한 셈이다. 이번 처분 오류로 “증거를 철저히 수집해서 사건을 면밀히 재검토했다”라는 지난달 12일 김 위원장의 다짐이 무색해졌다.

공정위의 어설픈 일 처리 탓에 검찰이 이 사건을 수사할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됐다. 현행법상 표시광고법 위반과 관련해서 공정위는 전속고발권을 갖고 있다. 공정위의 고발이 없으면 검찰은 SK디스커버리를 수사할 수 없다는 얘기다. 공정위는 부랴부랴 검찰의 공소장에 해당하는 심사보고서를 다시 작성해 SK디스커버리에 보낸 뒤 지난달 28일 전원회의를 다시 열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SK디스커버리를 검찰에 고발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건의 공소시효는 다음 달 2일까지다. 불과 한 달도 남지 않았다. 공정위는 뒤늦게 재발 방지에 나섰다. 박재규 공정위 상임위원은 “조사단계부터 조사 대상 소속 회사들의 변동 상황을 지속적으로 확인할 필요가 있다”라며 “사건 절차 규정에 (변동 상황에 대한) 확인 의무 및 절차·방법을 규정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일이지만 이제라도 외양간을 제대로 고쳐야 한다.

공정위의 SK케미칼 조사 및 처리 경과

● 2012년 SK케미칼 등 CMIT/MIT 성분 함유 살균제 제조·판매업체 무혐의 처분
● 2016년 시민단체 신고로 SK케미칼 등 재조사
● 2016년 8월 심의절차 종료(무혐의)
● 2017년 12월 ‘가습기 살균제 사건처리 태스크포스’ 에서 “2016년 사건 처리에 일부 잘못” 결론
● 2018년 2월 재조사 후 SK케미칼 등 검찰에 고발
● 2018년 2월 SK케미칼이 분사 통해 SK디스커버리와 SK케미칼로 나뉜 사실 뒤늦게 인지

하남현 경제부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