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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따로, 미국 따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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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정재
이정재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한 달쯤 전이다. 통상 관련 정부 고위 관계자 A와 만났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삼성·LG 세탁기에 대해 긴급수입제한조치(세이프가드)를 발동해 시끄러울 때였다. 속내를 물어봤다. 왜 지난해 중국이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보복할 때는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하지 않았느냐고. 그러면서 왜 지금 미국에는 당장 WTO 제소를 말하느냐고. 잠시 머뭇거리던 A가 입을 열었다.

사드 때는 한마디도 없다가 #왜 지금 통상·안보 따로인가

“중국은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 더 센 보복을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제소하기 어려웠다. 실익은 없고 되레 더 큰 화를 입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미국은 다르다. 법과 제도로 움직이고 이성이 있는 나라다. 트럼프 대통령 독단으로 뭐든지 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그러니 WTO 제소로 응수할 수 있다.”

에둘러 말했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법보다 주먹이 무섭다’는 거였다. 충분히 이해는 됐지만 불편함은 남았다. 동네 노점상이라면 몰라도 대한민국의 통상 정책이 그런 식으로 결정돼서는 안 되는 거였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미국에 대해 “통상 따로, 안보 따로”를 말했을 때, 그 이유로 “당당함”을 들었을 때, 한 달 전의 불편함이 떠올랐다. 평소라면 백번 맞는 말이요, 심정적으로도 충분히 이해된다. 트럼프의 퇴행적·폭력적인 보호무역 조치야말로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왜 불편했을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시기다. 왜 지금인가. 하필 중국의 사드 보복에 끝내 침묵한 뒤다. 이왕이면 중국에 3불(不)을 약속하기 전에, WTO 제소는커녕 항의 한마디 못하고 물러나기 전에, 대통령의 혼밥 논란이 일기 전에 ‘당당함’을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랬다면 지금처럼 ‘중국 따로, 미국 따로’냐 ‘반미봉중(反美奉中)이냐’는 논란은 일지 않았을 것이다.

트럼프의 공격은 충분히 예상됐던 바다. 대선 때는 물론 대통령이 된 후로도 트럼프는 여러 차례 경고했다. 아주 직접적인 사인도 보냈다. 지난해 청와대를 방문했을 때 그는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을 콕 찍어 “당신이 FTA(자유무역협정) 책임자 맞죠? 일할 준비가 돼 있느냐”고 물었다. 지난달 미 국제무역위원회(ITC)가 삼성·LG 세탁기 제재안을 올리자, 트럼프는 그중 가장 강력한 제재안을 골라 서명했다. 더 분명할 수 없는 경고들이다. 그 긴 시간 동안엔 도대체 뭘 했고, 왜 아무 말도 없었을까.

더 우려되는 건 대통령의 현실 인식이다. ‘통상 따로, 안보 따로’는 비현실적이다. 역사만 잠깐 돌아봐도 알 수 있다. 아편전쟁이 뭔가. 아편 수입을 막는 중국을 열강이 강제로 침략한 제국주의 전쟁 아닌가. 일제의 강화도 침공도 구실은 대원군의 보호주의 정책이었다. 트럼프는 “북한의 이간질에 우리는 (남한에 대해) 무역이라는 수단이 있다”고 했다. ‘통상=안보’로 본다는 의미다. 시진핑 주석이 ‘통상 따로, 안보 따로’라고 생각했다면 사드 보복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 대통령만 ‘안보 따로, 통상 따로’인가.

셋째, 대통령의 귀를 엉뚱한 사람이 잡고 있는 건 아닌가. 그가 누군지 모르나 적어도 경제·통상 전문가는 아닌 듯하다. 그랬다면 이 민감한 시기에 대통령이 “한·미 FTA의 법적 체계가 공정하지 못하다”며 해묵은 논쟁, 해법 없는 논란거리를 꺼냈을 리 없다. 하기야 청와대엔 눈 씻고 찾으려 해도 통상 전문가가 없는 실정이니 따로 대통령에게 말할 입도 있을 리 없다.

A는 요즘 정신없이 바쁘다. GM 문제까지 겹쳤다. 이제야 한 달 전 불편함의 진짜 이유를 알았다. A에게 해야 할 한마디를 못한 것이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해야겠다. ‘깡패 앞에선 침묵하는 당당함으로는 트럼프의 미국을 상대할 수 없다.’

이정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