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에이지레스 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1면

김남중 기자 중앙일보
김남중 논설위원

김남중 논설위원

한국의 최성숙(86) 할머니와 일본의 가타가베 지즈코(87) 할머니. 80대 고령인 거 말고 공통점이 또 있다. 나이를 잊은 채 활기차고 열정적인 삶을 사는 전형으로 상찬을 받는다는 거다. 춘천 사는 최 할머니는 16년째 홀몸 노인들에게 도시락을 배달하며 ‘수퍼 시니어’로 불린다. 봉사활동한 공이 인정돼 국회의장이 주는 표창장을 받았다. “남을 도우며 살다 보니 마음도 편하고 아픈 곳도 없다”고 한다.

미야자키현에 사는 가타가베 할머니는 정년퇴직 후 독학으로 거문고를 익혔다. 동아리를 만들어 회원을 가르치고 매년 30회 남짓 복지시설을 방문해 위문공연을 한다. 지난해 일본 정부가 주는 ‘에이지레스(Ageless) 상’을 받았다. 활기차게 생활하는 고령자를 독려하는 상이다.

두 할머니는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에 맞춤한 노인상을 보여 준다. ‘틀딱충(틀니를 한 노인)’ 비하와는 거리가 멀다. 안타까운 건 이들의 존재가 무색하게도 고령사회가 심화시키는 연령차별의 그늘이 짙다는 거다. 연령차별은 노인에 대한 경직된 편견과 반감, 혐오의 조합이다. 미국 노인의학자 로버트 버틀러가 1969년 정의한 에이지즘(Ageism)이다. 지난해 한국노년학회 국제심포지엄에서 발표된 영국 사례를 보면 에이지즘 경험 빈도(35%)가 성차별(25%)이나 인종차별(17%)을 훨씬 앞선다. 에이지즘이 노인 빈곤, 노인 소외, 노인 자살을 가속화하는 사회문제로 지적되는 이유다.

일본 정부가 이런 에이지즘에 반기를 들 태세다. 아베 신조 총리가 얼마 전 고령사회 대책회의에서 ‘에이지레스 사회’를 선언했다. 사람을 나이로 구별하지 않고, 누구나 더 일할 수 있는 연령차별 없는 사회를 지향하겠다는 의미다. 고령화 문제를 ‘국난적 상황’으로 보는 인식이 바탕에 깔려 있다. 에이지레스 사회의 시작은 65세라는 일률적 노인 기준 없애기다. 나이 듦을 이유로 단정 짓고 정형화하는 노인차별의 출발선이라고 여겨서일 터다.

‘반(反)에이지즘’의 요체는 결국 노년을 바라보는 시각의 교정이다(애슈턴 애플화이트 『나는 에이지즘에 반대한다』). 노인이 꿔서라도 데려와야 할 지혜의 표상이라거나 효와 공경의 대상이란 인식이 흐릿해지는 건 그렇다 치자. 노쇠한 노인 탓에 사회가 활력을 잃을 거란 혐오로 가선 곤란하다. 최·가타가베 할머니처럼 노인이 사회의 부담이 아니라 기여자란 인식이 긴요하다. 누구든 나이가 든다. 나이 든 것에 자부심을 가질 수 있어야 고령사회가 지속 가능하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