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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정·갑질에 분노한 2030 … 윗분들의 ‘죄송 올림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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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평창 겨울올림픽은 ‘사과’ 올림픽이라 부를 만하다. 올림픽을 준비하는 과정부터 시작된 ‘불공정’ ‘갑질’ 논란에 사과가 끊이질 않고 있다.

젊은 세대가 바꾸는 올림픽 풍경

윤 선수의 어머니 조영희씨(사진 가운데)가 관람석에서 아들의 우승 순간을 지켜보며 손을 흔들고 있다.[강릉=뉴스1]

윤 선수의 어머니 조영희씨(사진 가운데)가 관람석에서 아들의 우승 순간을 지켜보며 손을 흔들고 있다.[강릉=뉴스1]

지난 16일 스켈레톤 윤성빈(24)은 한국 선수단에 두 번째 금메달을 안겼다. 한국 겨울올림픽 역사상 빙상 종목이 아닌 썰매 종목에서 처음 나온 메달이어서 의미가 컸다. 설날 아침 온 국민은 윤성빈의 쾌거에 기뻐했다. 그런데 우승이 확정된 뒤 피니시 하우스(골인 지점)에 들어온 윤성빈의 옆에는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규정에 따르면 AD(Accreditation) 카드가 없는 박 의원은 티켓을 사서 관중석에서만 응원하는 것이 마땅했다.

윤성빈의 어머니와 여동생도 AD 카드가 없어 피니시 라인 밖에서 윤성빈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박 의원의 ‘특혜 응원’에 대한 비난이 확산됐다. 박 의원은 하루 뒤인 17일 페이스북에 “국민 여러분께 죄송스러운 마음을 전한다”며 “국제올림픽위원회(IOC)의 초청 게스트(Distinguished Guest Pass)로 경기장에 가게 됐고, 올림픽패밀리 라운지에서 다른 분들과 함께 그곳으로 안내받아 이동했다”고 해명했다.

박영선, 금지 구역 들어가 특혜 논란

윤성빈 선수 특혜 응원으로 구설에 오른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윤 선수 뒤)이 지난 16일 평창 올림픽슬라이딩센터 피니시 라인에서 윤 선수를 축하하고 있다. [강릉=오종택 기자]

윤성빈 선수 특혜 응원으로 구설에 오른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윤 선수 뒤)이 지난 16일 평창 올림픽슬라이딩센터 피니시 라인에서 윤 선수를 축하하고 있다. [강릉=오종택 기자]

같은 날 이기흥 대한체육회장도 사과했다. 15일 크로스컨트리 경기장을 찾은 이 회장과 체육회 집행부는 IOC가 예약한 올림픽패밀리(OF) 좌석에 앉았다가 “다른 자리로 옮겨 달라”는 자원봉사자의 요청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이 회장과 동행한 체육회 관계자가 직무 원칙을 지키며 정중하게 자리 이동을 요청한 자원봉사자에게 고압적인 말을 해 막말 논란에 휩싸였다.

또 지난 16일에는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이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 그리고 평창조직위에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고개를 숙였다. 14일 스켈레톤 선수 출신인 애덤 팽길리(41·영국) IOC 선수위원이 평창 메인프레스센터 주차장 인근에서 보안요원과 승강이를 벌이다가 그를 넘어뜨리고 폭언을 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16일 강원도 평창군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남자 스켈레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낸 대한민국 윤성빈이 태극기를 들고 내빈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평창=연합뉴스]

16일 강원도 평창군 슬라이딩센터에서 열린 남자 스켈레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따낸 대한민국 윤성빈이 태극기를 들고 내빈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더불어민주당 박영선 의원, 도종환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평창=연합뉴스]

이틀 동안 올림픽 운영과 관련해 지도층 인사들이 사과를 한 것만도 세 차례다. ‘특혜’ ‘막말’ ‘폭행’이 사과를 하게 된 이유다. 사람들은 올림픽을 운영·관리하는 리더들의 권위적 행동을 ‘힘없는’ 자원봉사자와 선수 가족을 향한 ‘갑질’로 받아들였다. 포털 사이트에 게재된 관련 기사에는 당장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렸다. 2030세대의 분노가 특히 컸다.

대한체육회장, 자원봉사자에 막말

김석호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국민들이 사회 지도층 인사들에게 요구하는 기준이 달라졌지만 5060 리더들은 이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며 “우리 사회가 높은 수준의 절차적 합리성 및 정당성을 요구한다는 것을 지도층 인사들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이게 갑질 논란의 핵심”이라고 분석했다.

‘사과 퍼레이드’는 평창올림픽 개막 전부터 나왔다. 정부가 선수들과 소통을 하지 않고 여자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 구성을 일방적으로 추진하다 거센 반발에 부닥쳤다. 이낙연 총리의 “여자아이스하키는 메달권도 아닌데…”라는 발언은 기름에 불을 붙인 격이 됐다.

젊은층 댓글 수천 개 달며 분노 표현

단일팀 구성으로 한국 선수 일부가 경기에 뛰지 못하게 되자 비판적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선수들이 피땀 흘려 얻은 올림픽 출전 기회를 국가 권력이 일방적으로 빼앗았다고 인식했다. 결국 이낙연 총리와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면서 일단락됐지만 문재인 정부의 지지율에 영향을 줄 정도로 파급력이 컸다. 또 개막 직전에는 평창올림픽 자원봉사자 홀대 논란이 불거져 조직위원장이 팔 걷고 나서서 재발 방지를 약속하기도 했다.

14일 강릉 아이스 아레나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한일전이 열렸다. 남북 열띤 응원전이 펼쳐졌다. 강릉=오종택 기자

14일 강릉 아이스 아레나에서 여자 아이스하키 한일전이 열렸다. 남북 열띤 응원전이 펼쳐졌다. 강릉=오종택 기자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스포츠를 바라보는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그동안 스포츠는 내셔널 프라이드를 확산하는 수단으로 여겨졌다. 5060세대가 이 패러다임에 갇혀 있다면, 2030세대는 스포츠 자체를 수단이 아닌 목표로 여긴다. 스포츠 자체를 즐기고 공정하게 운영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인식한다. 여기에서 가치관의 충돌이 생겼다. 남북 단일팀 논란은 정부가 스포츠를 수단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도층 빠른 사과도 사회 변화 방증”

기성세대들은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에 익숙하다. 하지만 ‘N포 세대(N가지의 것들을 포기한 세대)’로 대변되는 젊은 세대들은 이런 방식을 이해하지 못한다. 권력의 갑질에는 극도로 예민하다.

이번 올림픽에선 자원봉사자와 관련한 갑질 고발이 유독 많다. 자원봉사자의 주류를 이루는 건 2030세대들이다. 이들은 불합리하다고 여길 경우 소셜미디어를 통해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한다. 대한체육회 막말 파문은 자원봉사자들이 모여 있는 익명 페이스북을 통해 알려졌다. 박영선 의원의 AD 카드 논란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먼저 불거졌다.

자원봉사자들 격려하는 문 대통령 [강릉=연합뉴스]

자원봉사자들 격려하는 문 대통령 [강릉=연합뉴스]

김석호 교수는 “자원봉사자 관련 논란이 계속되는 건 그들을 ‘부리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자원봉사자들의 순수한 봉사정신과 그들의 역할에 대해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을 갖고, 함께 호흡해야 하는데 여전히 곳곳에 전근대적 사고방식이 남아 있다”며 “문체부와 체육회·조직위 등은 자원봉사자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게 지원해 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류태호 고려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스포츠는 공정성이 핵심 가치다. 불공정한 사건이 빈발하고 갑질 논란이 올림픽 무대에서 불거지자 일반 국민들, 특히 청년층이 분노하고 있다”며 “그래도 지도층 인사들이 문제를 인식하고 재빨리 사과하는 건 사회가 변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말했다.

평창올림픽 ‘사과’ 일지

1월 19일 이낙연 국무총리
남북 단일팀 관련 ‘여자아이스하키 메달권 아닌데…’ 발언으로 논란

1월 26일 김상항 대한빙상경기연맹 회장
스피드스케이팅 노선영 대표 탈락, 쇼트트랙 대표팀 코치 폭행 사과

1월 30일 문재인 대통령
남북 단일팀 “평화 올림픽을 위해 좋다고 생각했는데 선수들의 입장을 헤아리지 못해”

2월 2일 이희범 평창올림픽조직위원장
올림픽 운영 인력 열악한 숙식과 교통 여건 등 불편 사항 “지속적으로 시정하겠다”

2월 16일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
애덤 팽길리 IOC 선수위원의 보안요원 폭행 관련 당사자 직접 방문, 사과

2월 17일 이기흥 대한체육회장
체육회 관계자 자원봉사자에 막말 파문 “책임을 다하고자 했던 분들의 노고 존중”

2월 17일 박영선 국회의원
스켈레톤 윤성빈 특혜 응원 논란, 어머니도 못 들어간 피니시 하우스 출입

강릉=김원 기자 kim.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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