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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황도록에 홀린 창수훙 “돈황서 살고 돈황서 죽겠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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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9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66>

프랑스 유학시절, 유학 온 중국 예술가들과 어울린 창수훙(왼쪽 첫째)과 천즈슈(왼쪽 둘째). 1932년 리옹.

프랑스 유학시절, 유학 온 중국 예술가들과 어울린 창수훙(왼쪽 첫째)과 천즈슈(왼쪽 둘째). 1932년 리옹.

돈황도록(敦煌圖錄)을 보며 넋을 잃은 창수훙에게(常書鴻·상서홍) 서점 주인이 한 말은 이랬다. “기메박물관에 가 봐라. 돈황 문물이 많다.”

천불동 벽화 보며 “맙소사” 연발 #“파리는 더 있을 곳 못돼 돈황 갈것” #학업 못마친 아내 놔두고 먼저 귀국 #언론 “안락한 생활 포기하고 돌아와” #중국 대표 화가 행보에 모두 놀라 #“도둑 탓 문물 남아나지 않을까 우려” #국민당, 돈황문물연구소 설립 지시

그날 밤 창수훙은 잠자리에 들지 못했다. 도록만 뒤적거렸다. 돈황 천불동(千佛洞)의 벽화와 찰흙으로 빚은 소상(塑像)을 보며 “맙소사”를 연발했다. 훗날 회고록에 그날 밤의 감동을 빠뜨리지 않았다. “어디에 이런 보물들이 있는지 어처구니가 없었다. 감숙(甘肅) 돈황 천불동이라고 쓰여 있었다. 대영박물관과 루브르에 갈 때마다 기독교 회화에 경탄하곤 했다. 천불동의 벽화에 등장하는 신(神)과 군상(群像)의 생동력은 그간 내가 심취했던 서구의 작품들을 능가했다. 목록 서문에 5세기의 작품이라고 쓰여 있었다. 1000년 하고도 500년 전 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기메박물관의 첫 번째 관람객이었다.”

프랑스 동양학자 페리오가 돈황에서 훔쳐 온 거나 다름없는, 당대(唐代)의 대형 견화(絹畵)들이 창수훙을 기다리고 있었다. 7세기 무렵, 돈황의 불교도들이 돈황 사원에 헌납한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은 걸작 중에 걸작이었다. 창스훙은 경악했다. “피렌체 화파의 창시자 지오토(Giotto Di Bondone)보다 700년 전, 유화의 창시자 에이크(Jan Van Eyck) 그림보다 800년 전의 작품들이었다. 시대는 물론이고, 기법이나 수준도 돈황석굴의 작품들이 더 선진적이었다.” 부인 천즈슈(陳芝秀·진지수)도 “돈황은 들어 본 적도 없는 지명”이라며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창수훙은 귀신에 홀린 사람 같았다. 돈황을 입에 달고 다녔다. 눈만 뜨면 기메로 달려갔다. 천즈슈에게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말을 했다. “파리는 더 있을 곳이 못 된다. 돈황으로 가겠다. 앞으로 내가 살 곳은 돈황이다. 살아도 돈황에서 살고, 죽어도 돈황에서 죽겠다. 나와 함께 조국으로 돌아가자.”

창수훙의 뚱딴지같은 제안에 천즈슈는 머리가 복잡했다. 학업을 마치지 못했다고 둘러댔지만, 파리를 떠날 생각이 없었다. 창수훙의 결심은 철벽같았다. 천즈슈를 달랬다. “나 먼저 귀국할 테니 학업을 계속해라. 내가 안정되면 돌아와라.”

창수훙이 돈황(敦煌)에 안착하기까지는 곡절이 많았다. 1936년 가을, 귀국 열차에 올랐다. 그날따라 보슬비가 내렸다. 목적지는 돈황이었다. 베를린, 바르샤바를 거쳐 만주리(滿洲里)에 도착했다. 동북은 일본의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일본 헌병이 짐을 수색했다. 그림과 지도들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창수훙은 혈압이 올랐다. “나는 예술가다. 조국에 돌아왔다”며 항의했다. 첫날을 헌병대 철창에서 보내며 몇 대 얻어터졌다.

베이핑의 일간지가 창수훙의 귀국을 큼직하게 보도했다. “프랑스에서 인정받은 화가 창수훙이 안락하고 여유 있는 생활을 포기하고 조국으로 돌아왔다. 쉬베이훙(徐悲鴻·서비홍), 장다첸(張大千·장대천)과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화가의 최종 목적지가 돈황이라는 말에 모두가 놀랐다. 서북의 끝자락인 돈황 일대는 정세가 불안정한 지역이다. 한동안 베이핑국립예전(北平國立藝專)에서 젊은 예술가들을 지도할 예정이다.” 베이핑에 도착하는 날 창수훙은 예전 교수와 학생들의 박수와 꽃다발에 당황했다. 에워싼 학생들에게 한 첫 질문이 가관이었다. “너희들은 언제 돈황에 갈 생각이냐?” “역시 소문대로”라며 폭소가 터졌다.

돈황 초기 시절의 창수훙 가족. 1946년 가을, 돈황 막고굴(莫高窟), 린인루(林陰路). [사진 김명호]

돈황 초기 시절의 창수훙 가족. 1946년 가을, 돈황 막고굴(莫高窟), 린인루(林陰路). [사진 김명호]

이듬해 7월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창수훙은 작품 50여 점 들고 수도 난징(南京)으로 갔다. 딸 데리고 귀국한 천즈슈와 여관방을 전전했다. 옛 친구들과 전시 수도 충칭(重慶)에 가기까지 별꼴을 다 겪었다. 국민당 선전부장이 국민당 입당을 요구했다. 창수훙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나는 정치에 문외한이다. 돈황 외에는 관심이 없다.”

창수훙은 도둑들과 인연이 많았다. 돈황에 대한 관심이 돈황 문물 도둑질해 간 페리오 때문이었고, 전쟁시절 돈황에 갈 수 있었던 것도 도둑놈 덕이었다. 1942년 봄, 허난(河南)성 뤄양(洛陽) 용문석굴의 대형 부조(浮雕) 황부예불도(皇后禮佛圖)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여론이 물 끓듯 했다. “정부는 인간쓰레기 창고다. 엉뚱한 기관 만들어서 생사람 잡지 말고, 도둑놈들이나 제대로 단속해라. 이러다간 돈황 문물도 남아나지 않을까 우려된다.” 압력을 느낀 국민당 정부는 돈황 문물 보호에 나섰다. 교육부에 ‘돈황문물연구소’를 설립하라고 지시했다. 교육부장이 주임을 겸했다. 감찰원장 위유런(于右任·우우임)이 창수훙을 부주임에 천거했다.

창수훙은 제 귀를 의심했다. 생면부지(生面不知)인 위유런을 찾아갔다. 위유런이 간곡하게 당부했다. “돈황은 우리 민족의 보물 창고다. 4세기에서 14세기까지 천년간의 보물이 굴 안에 있다. 세계에 이런 곳은 돈황뿐이다. 지금 우리는 전쟁 중이다. 언제 잿더미가 될지 모른다. 너 같은 사람이 아니면 보호가 불가능하다. 네 손으로 국보를 지키고 복원시켜라.” 돈은 한 푼도 안 줬다.

창수훙은 연구소 조직을 서둘렀다. 문제는 자금이었다. 근심이 태산 같았다.<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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