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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황의 수호신’ 창수훙, 파리 유학 때 천즈슈와 결혼했지만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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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8호 28면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65>

프랑스 유학 시절 서구 미술에 심취했던 시절의 창수훙(오른쪽)과 천즈슈. 1933년 파리.

프랑스 유학 시절 서구 미술에 심취했던 시절의 창수훙(오른쪽)과 천즈슈. 1933년 파리.

1981년 봄, 최고 실권자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둔황(敦煌)을 찾았다. 동갑인 둔황 문물연구소 소장 창수훙(常書鴻·상서홍)의 업적과 공로를 찬양했다. 워낙 건조한 지역이라 입에 침이 마를 정도였지만, 찬사가 그치지 않았다. 연신 물을 들이켜며 “인제 그만 베이징에 안착하라”고 권했다. 간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3세에 한 달간 배타고 파리로 가 #“도착하자마자 루브르 박물관 찾아 #온종일 빵 한조각 먹고도 배 안 고파” #미술전서 잇따라 수상해 유명해져 #천즈슈와 신혼살림 차려 작품 활동 #센 강 변서 우연히 둔황 도록 발견 #이후 둔황 문물 탐구해 ‘수호신’ 칭송 #천즈슈, 훗날 창수훙 버리고 떠나

이듬해 3월, 창수훙은 반세기에 걸친 영욕과 애정, 온갖 원망을 사막의 동굴 속에 묻고 베이징으로 이주했다. 1993년 여름, 회고록 『둔황 50년』을 완성하고, 몇 개월 후 세상을 떠났다. 국학대사 지센린(季羨林·계선림)이 창수훙의 일생을 몇 자로 정리했다. “회화대사(繪畵大師)이며 둔황의 수호신(守護神). 대명(大名)을 우주에 드리웠다.” 당연한 찬사였다.

창수훙은 명승지 항저우(杭州)에 주둔하는 만주족 기병 장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혼자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부친은 아들이 기술자가 되기를 바랐다. 창수훙은 효자였다. 공업학교에 진학했다. 전기과에 합격했지만, 회화와 관련 있는 염직(染織)과 수업만 들었다. 틈만 나면 스케치북 끼고 시후(西湖) 주변을 떠돌았다.

친한 친구 아버지가 창수훙의 그림을 좋아했다. “돈은 내가 대겠다, 내 아들과 함께 일본 유학을 떠나라”고 권할 정도였다. 창수훙은 완곡히 거절했다. “집안 경제 상황이 심각하다. 생존 문제가 시급하다.” 친구가 일본 유학 떠나는 날, 작심했다. “언젠가는 미술 공부하러 프랑스로 가겠다. 화가가 되려면 일본은 프랑스만 못하다. 소 아홉 마리가 잡아끌어도 이 결심은 바꾸지 않겠다.”

울적함을 달래러 고모 집에 갔다. 고모부의 조카뻘 되는 여자애가 놀러 와 있었다. 창수훙은 눈이 번쩍했다. 천즈슈(陳芝秀·진지수), 훗날 창수훙의 교처(嬌妻)로 명성을 떨치고, 사막 한복판에서 창수훙을 버리고 떠난 여인이었다. 젊은 남녀는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하다. 기분 나쁜 날 만난 상대는 서로의 호감을 끌기에 부족하고, 천하 미인도 만난 장소가 개떡 같으면 마찬가지다. 모든 조건이 그럴듯하면, 서로 인연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는다. 천즈슈와 창수훙도 그랬다.

천즈슈는 강남의 부잣집 딸이었다. 남자라면 누구나 좋아할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곱게 단장할 줄 알고 교태가 넘쳤다. 발목이 가늘고 신발도 예뻤다. 염직에도 관심이 많았다. 천즈슈도 단정하고 예술적인 창수훙에게 끌려 들어갔다. 두 사람은 눈만 뜨면 시후를 산책했다. 자신의 초상화를 선물 받은 천즈슈는 젊은 천재 예술가의 팔에 매달렸다.

리청셴 (李承仙·왼쪽)은 창수훙의 성실한 조력자였다. 1947년 둔황에서 창수훙과 결혼했다. 1993년 겨울, 창수훙은 병문안 온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에게 자신이 못 한 일을 리청셴이 대신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진 김명호]

리청셴 (李承仙·왼쪽)은 창수훙의 성실한 조력자였다. 1947년 둔황에서 창수훙과 결혼했다. 1993년 겨울, 창수훙은 병문안 온 국가주석 장쩌민(江澤民)에게 자신이 못 한 일을 리청셴이 대신 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진 김명호]

1927년 여름, 23세 생일을 마친 창수훙은 프랑스행 배를 탔다. 선표는 친구 아버지가 사줬다. 한 달간 배 안에서 승객들에게 그림 그려주며 돈을 모았다. 회고록 한 구절을 소개한다. “야밤에 파리에 도착했다. 날이 밝자 루브르 박물관으로 달려갔다. 아침에 빵 한 쪽 먹은 게 다였지만 온종일 배고픈 줄 몰랐다. 다음 날도 그랬고, 그다음 날도 그랬다. 고 이집트와 그리스·로마의 예술품 바라보며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나는 서양 문화에 경도됐다. 마치 그리스나 로마에서 온 예술가가 된 기분이었다. 몽파르나스의 화가로 자처했다. 조국의 저급한 문화에 자괴감 느꼈다. 조상들의 위대한 예술혼을 몰랐던 무지의 극치였다.”

창수훙은 일과 그림 공부를 병행했다. 부지런한 성격과 건강 덕에 굶지는 않았다. 리옹 미술학원 예과에 무난히 합격했다. 1년 후 본과 진학시험에서 소묘 부분 최고 성적을 받았다. 유화에 재능 있는 화가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 파리 고등미술학원도 창수훙의 입학을 거부하지 않았다. 미술전에서 금상과 은상을 네 번 차지하자 파리 미술가협회에서 가입신청서를 보내왔다.

천즈슈가 파리에 나타났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렸다. 신혼집엔 파리에 와있는 중국 화가들의 발길이 그치지 않았다. 항상 북적거렸다. 중국 화단의 대부 쉬베이훙(徐悲鴻·서비홍)과 미모의 부인 장비웨이(蔣碧薇·장벽휘)는 프랑스 유학 시절 제3자가 끼어들 틈이 있었지만, 창수훙과 천즈슈는 모범부부였다. 천즈슈는 조각에 열중하고, 창수훙은 그림에만 전념했다. 천즈슈는 창수훙의 영혼이나 다름없었다. 모든 그림의 주인공 대부분이 천즈슈였다.

창수훙은 센 강 변 산책을 즐겼다. 딸이 태어나자 샤나(沙娜·사나)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중국인들이 센을 ‘沙娜’로 표기할 때였다. 둔황과의 해후도 센 강 변에서 시작됐다. 1935년 여름 어느 날, 루브르 박물관을 나온 창수훙은 시내를 산책했다. 센 강 변에 도달하자 자주 가던 고서점으로 들어갔다. 이 책 저 책 뒤지던 중 6권짜리 작은 도록에 눈길이 갔다. 제목이 『둔황도록(敦煌圖錄)』이었다.

『돈황도록』은 1907년 프랑스 출신 동양학자 페리오(Paul Pelliot)가 둔황석굴에서 촬영한 사진첩이었다. 서구의 미술에 경탄하던 창수훙은 조상들의 생동력에 전율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넋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서 있자 책방 주인이 말을 걸었다.<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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