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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생헌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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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논설위원

강민석 논설위원

영화 ‘1987’의 라스트 신은 ‘미완의 6월’이다. 문익환 목사의 “박종철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라는 절규와 함께 ‘그날이 오면’이란 노래가 흐르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하지만 존재했던 1987년은 영화보다 길다. 영화에 담기지 않은, 바로 이어지는 역사가 노태우 민정당 대표의 ‘6·29 선언’이다. 피플파워에 놀라 대통령 직선제를 수용한 그의 6·29 선언으로, 짜고 치는 고스톱이었든 아니었든 전두환 대통령의 4·13 호헌(護憲) 선언이 무력화됐다.

이제는 가히 전설의 고향급이 되어버린 다방(茶房)이란 게 있다. 6·29 선언이 나오자 서울 중구의 프라자호텔 뒤편 ‘가화’라는 다방에 “오늘은 기쁜 날, 찻값은 무료입니다”라는 벽보가 붙었다. 월드컵 4강 진출 때나 붙을 법한 벽보가 정치 이슈로 붙었으니 당시 국민이 얼마나 환호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그해 10월 12일 국회는 ‘5년 단임+대통령 직선제’를 골자로 한 개헌안을 가결했다. 보름 뒤인 10월 27일의 국민투표로 새 헌법이 태어났다.

꼭 50일 뒤인 그해 12월 16일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만약 ‘1987’이 김영삼·김대중의 ‘민주주의 진로방해죄’ 탓에 결국 “오늘은 기쁜 날…”을 군사정권이 차지했던 그 허무한 결말을 담았더라면, 영화는 아마 역대급 반전(反轉)영화로 기록됐을 것이다.

다시 30년이 흘렀다. 여야가 2월 중 개헌 협상에 들어간다고 한다. 87년 헌법이 수술대에 오른다.

어떤 여론조사를 봐도 국민 60% 이상이 개헌을 원한다. 87년 헌법을 부정하라는 게 아니라 극복하라는 메시지다. 사실 87년 헌법은 ‘전두환 방지법’ 성격의 미생(未生)이다. 이젠 시대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협상 전망은 어둡다. 무엇보다 자유한국당이 내심 개헌투표와 동시에 지방선거를 치르면 투표율이 올라가 선거에 불리하다는 계산을 하고 있다. 선거 변수가 개헌만 있는 건 아닌데도 말이다. 실제로 87년 10월 27일 개헌투표에는 국민 78.2%가 참여했다. 찬성은 이 중 93.1%였다. 그런 엄청난 개헌 열기와 50일 뒤 대선 결과는 분명 별개였다. 더불어민주당도 개헌을 이념 문제로 몰고 가거나, 야당의 반대 입장을 부각해 지방선거에서 반사이익을 얻으려는 식의 접근을 하지 말아야 한다.

개헌을 하려면 양당 모두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누가 협상테이블에서 ‘고의 부도(不渡)’를 내려 하는지 다 보인다는 것만 안다면 발상을 전환하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될 것이다.

강민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