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차 내정 철회 사전통보 없이 사후 양해만 … 미, 코리아 패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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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국 백악관이 빅터 차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석좌에 대한 주한 대사 내정을 철회한 데 대해 노규덕 외교부 대변인은 1일 “미측은 한국 측과의 적절한 협의 이전에 관련 상황이 언론에 보도된 데 대해 외교채널로 우리 측에 양해를 구해 왔다”고 밝혔다. 미국이 내정 철회 사실을 사전에 공식 통보하지 않았다는 확인이었다.

미국, 보도 뒤 연락 ‘외교 결례’ 논란 #청와대 “인사문제 … 언급 사항 아니다” #“한국 향한 트럼프의 시그널” 분석도

노 대변인은 차 석좌가 코피 전략(북한에 대한 정밀·제한적 타격) 등 강경 대북정책에 반대했기 때문에 낙마했다는 미 언론 보도에 대해 “추측성 내용이 주류”라며 “분명한 것은 대북정책과 관련해 한·미 양국 정부 간에 이견은 없고 긴밀히 조율 및 공조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답했다. 하지만 주한 미국대사 공석이 1년을 넘긴 데다 평창 겨울올림픽이라는 중대 행사를 앞두고 백악관이 아그레망(주재국 동의 절차)까지 받은 대사 내정자를 낙마시키면서 정부의 이런 설명은 설득력이 떨어지고 있다.

청와대 관계자는 “미국의 인사권 문제에 대해 청와대가 언급할 사안이 아니다”고 말했다. 미측의 사전 공식 통보가 없었던 데 대해서는 “청와대가 관련 언급을 하지 않았다고 (철회 사실을) 몰랐다고 할 수 있느냐”고 했다. 외교 소식통은 “몇 주 전 외교 경로로 차 석좌가 힘들 수 있다는 분위기를 전해는 들었다”고 설명했다.

주한 대사 임명이 미국의 인사권 문제인 것은 맞다. 하지만 차 석좌에 대해 한국 정부는 지난해 12월 이미 아그레망을 승인했다. 그런데 사전 공식 통보도 없이 내정을 철회한 것은 동맹국 사이에서 발생하기 힘든 중대한 외교적 결례다. 미측은 차 석좌 낙마 보도 이후에야 외교채널을 통해 한국에 “결과적으로 주한 대사가 평창올림픽 전에 부임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다”고 알려왔다. 사전 설명이 아닌 사후 유감 표명이다. 이것도 일종의 코리아 패싱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특히 차 석좌의 낙마 이유가 근본적으로는 한·미 간 대북정책 이견에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워싱턴에 다녀온 외교가 소식통은 “트럼프 행정부가 뮬러 특검 문제로 국내적으로 힘든 상황이고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이 펼치는 대북정책에 대한 불만도 컸다. 이런 상황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차 석좌가 자신의 강한 의지와 의중을 한국에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전했다.

국내에서도 차 석좌 낙마가 내는 경고음을 잘 읽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소속 정양석 자유한국당 의원은 “차 석좌에 대한 내정 철회는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 정부에 불만을 드러낸 하나의 시그널”이라며 “북한의 평창올림픽 참가를 추진하며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을 우리 정부가 외면하고 있거나 모르고 있는 것 같다”고 비판했다.

유지혜·김경희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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