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땐 모든 나라 찾아 설득, 소련·중국 등 미수교국도 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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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평창 겨울올림픽이 8일 앞으로 다가왔지만 정작 시중에선 올림픽 자체보다 북한이 화제의 중심에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미국에선 공개적으로 “김정은의 평창 납치(hijack)”(백악관, 지난달 23일)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출범 직후부터 평창올림픽의 초점을 지나치게 ‘북한 참가’ 쪽에 맞췄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올림픽의 위상에 걸맞은 글로벌 외교력을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평창은 북 참가 매달리다 외교 실종 #시진핑 불참, 온다던 마크롱도 취소 #정상급 26명 참석, 실제 정상은 10명 #소치 땐 시 주석 등 정상급 40여 명

◆자승자박 된 ‘평화 올림픽’ 프레임=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뉴욕 ‘메트로폴리탄 평창의 밤’ 행사에서 “북한이 참여하는 평화 올림픽을 성사시키는, 어렵지만 가치 있는 도전에 나서려 한다”고 밝혔다. 이때부터 사실상 평화 올림픽 달성 기준은 북한 참가 여부가 됐고, 정부는 이를 위해 외교력을 집중했다.

지난해 12월 한·중 정상회담 뒤 나온 한국 측 언론발표문에 “양 정상은 평창 겨울올림픽에 북한이 참가하는 것이 남북관계 개선 및 동북아 긴장 완화에 기여할 것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함께 노력해 나가기로 했다”는 내용이 들어간 것도 그렇게 나온 결과였다. 이 한 문장을 위해 정부는 한·중 간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갈등을 매듭지으려 속도전을 벌였고, 대중 저자세 외교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오지 않는다.

미국 내 기류도 심상치 않다. 워싱턴 사정에 밝은 외교 소식통은 “미국 내에서 한국이 북한에 끌려다닌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특히 현송월 삼지연관현악단 단장이 방남한 이후 이런 기류가 더 강해졌다”고 귀띔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다보스 포럼에는 참석하면서 중요 동맹국인 한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에는 오지 않는 것을 두고도 외교가에서는 뒷말이 많다.

◆88올림픽 뒤 북방외교 열매로 이어져=청와대는 평창올림픽에 21개국에서 정상급 인사 26명이 방한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중 실질적 국가 정상만 따지면 10명밖에 되지 않는다. 동맹·우방국 정상 중엔 사실상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만 방한한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방한은 지난해 11월 무렵 사실상 확정됐으나 최근 돌연 취소됐다. 이는 시 주석을 포함, 36개국에서 정상급 인사 40여 명이 찾았던 2014년 소치 겨울올림픽과 대비된다.

외교가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스포츠 외교전 때와 같은 치열함을 이번엔 찾아보기 힘들다는 지적이 나온다. 당시엔 대한항공(KAL) 여객기 폭파 테러 등 북한의 방해 공작도 있었고, 87년 민주화시위 등으로 국내 정세도 혼란스러웠다. 미 상원은 안전과 전두환 정권의 인권 침해 문제 등을 이유로 서울이 올림픽 개최지로 적절치 않다는 결의를 채택하기도 했다. 최광수 당시 외무부 장관은 2012년 방송에 출연해 “한 나라 한 나라 다 설득하기 위해 전 재외공관이 나섰다”며 “안전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북한이 도발하지 않도록 소련과 중국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우방국들과 외교 교섭을 했다”고 말했다. 당시 서울올림픽 조직위 인사들은 모든 미 수교국을 방문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지금보다 훨씬 열악한 외교적 환경에서도 160개국 참가(한국 포함), 부총리급 이상 10여 명 참석 등의 성과를 냈다. 소련·중국 등 15개국은 당시 미수교국이었다. 이런 노력은 서울올림픽 이후 북방외교라는 열매로 이어졌다. 지금도 정부가 평창올림픽 이후 외교의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서울올림픽 때 현장에서 뛰었던 원로들은 평창올림픽을 세계의 스포츠 제전 그 자체로 성공적으로 치르고 한국의 역량을 세계에 보여 주는 것이 우선이라고 조언했다.

서울올림픽 조직위 국제담당 차장이었던 전상진 전 외교협회장은 “북한이 오든 안 오든 겨울올림픽의 성패와는 상관이 없다. 지나치게 모시려는 듯한 모습을 보일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또 “사고 없이, 신기록도 많이 나오고, 왔던 선수들이 만족하고 돌아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조직위 국제국장이었던 김삼훈 전 주유엔 대사는 “북한이 평창 참가를 계기로 국제사회의 책임 있는 일원으로 행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다른 중요한 것도 많다”며 “여름·겨울 올림픽을 모두 주최한 나라가 세계에 몇 없다. 그 자체로 국민적 자긍심을 갖고 안전하게 잘 치르면 된다”고 말했다.

유지혜·박유미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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