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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비록 당신이 서툴고 상처투성이일지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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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정여울 작가

정여울 작가

가끔 케케묵은 옛날 영화에서 오늘의 슬픔을 달래는 최고의 무기를 발견한다. 별다른 기대 없이 영화 한 편을 보다가 ‘내 안의 깊은 고민거리나 골치 아픈 화두’와 영화의 한 장면이 번쩍 스파크를 일으키는 순간이다.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건 중요치 않다 #나의 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행복한 사람이다

마이클 호프만 감독의 ‘한여름밤의 꿈’을 보며 시종일관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리던 나는 어떤 장면에서 불현듯 눈시울이 뜨거워지고 말았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리메이크하면서, 영화는 또 하나의 액자 속 이야기를 첨가하는데 그것은 서툴기 그지없는 유랑극단이 그리스신화 중 ‘피라모스와 티스베’라는 비극적 사랑 이야기를 연극무대에 올리는 것이었다. 극단은 엉망진창이다. ‘벽’을 사이에 두고 금지된 사랑을 나누는 피라모스와 티스베의 사랑 이야기를 아주 슬프게 연출해야 하는데, ‘벽’을 표현할 장비가 없어서 신참 배우가 벽 역할을 대신한다. 그의 어색하고 서툰 ‘발연기’ 때문에 두 사람의 안타까운 사랑은 코믹하고 우스꽝스러운 촌극이 되어버리고 만다.

나를 슬프게 만든 것은 연극의 감독을 맡은 연출가의 난처한 표정이었다. 배우들이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해도 주변 상황이 받쳐주지 않아 공연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리는 과정을 바라보며 연출가는 절망에 빠진다. 바로 옆집에 살면서도 서로 적대시하는 부모님들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피라모스와 티스베. 돌벽에 난 작은 균열 사이로 대화를 나누며 애틋한 사랑을 키우던 두 사람은 마침내 사랑의 도피를 결심하고,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던 티스베가 사자를 보고 도망치다가 베일을 떨어트리고, 방금 먹어치운 동물의 피를 입에 잔뜩 묻힌 사자는 티스베의 베일을 찢는다. 이윽고 피 묻은 베일을 발견한 피라모스는 그녀가 죽었다고 생각하며 슬피 울다 자결하고, 사랑하는 연인이 시체로 발견되자 티스베도 그 뒤를 따른다. 이 처절한 비극을 어설픈 시트콤으로 만들어버린 극단을 책임지는 연출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다. 최근 나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내가 전면에 나서야 하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지금 내 상황이 바로 그 연출가의 상황과 비슷해서 울컥하는 감정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과연 이 상황에서 잘해낼 수 있을까’하는 두려움이 내 맘을 꽉 채워버린 것이다.

이런 생각에 빠져 한참 감정이입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여장 배우(샘 락웰)가 놀라운 연기를 펼치기 시작한다. 연인의 시체를 껴안고 티스베는 심장이 말라붙도록 통곡하기 시작한다. 어설프기 그지없던 주인공이 연극의 라스트신이라는 마지막 기회를 최고의 구원투수로 만든 것이다. 관객을 감동시키는 배우의 열연 때문에 결국 끝이 좋으면 다 좋아지는 멋진 기적이 완성되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그건 중요치 않다. 그는 온전히 그 순간의 슬픔에만 집중했고 연기에 너무 몰입하여 억지스레 붙인 가발마저 벗어버리고 남자임을 숨길 수 없는 지경이 되어버렸지만 오히려 그 꾸밈없는 모습 때문에 난 울고 말았다. 온 마음을 바쳐 사랑했지만 이제 다시 그 웃음소리도 따뜻한 뺨도 만져볼 수 없는 죽은 연인을 향한 애절한 그리움, 당신 없는 세상에선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하는 여인의 간절함만이 무대를 온전히 장악한다. 오직 그 자리를 세상의 뜨거운 중심으로 만드는 순수함이 극단을 비웃던 모든 관객을 숨죽이게 만든다.

영화가 끝난 뒤 나는 자문자답해본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런 거 말고. 너 자신이 스스로에게 최선을 다했니?” “물론이지!” “그럼 됐지, 뭘 더 바래?” 과연 그렇다. 나는 서툴고, 상처 많고, 결핍투성이지만, 내 일을 사랑한다. 그걸로 되었다. 당신도 그럴 것이다. 지금 당신의 열정을 가장 많이 쏟아붓고 있는 그 일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니까. 나는 지금 이 삶을 사랑한다. 이 삶이 비록 서툴고 결핍투성이일지라도.

정여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