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호정의 왜 음악인가

10년 전 평양의 뉴욕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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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호정 기자 중앙일보 기자
김호정 아트팀 기자

김호정 아트팀 기자

2008년 2월 나는 평양에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대단한 정무감각의 소유자인 지휘자 로린 마젤(1930~2014)과 함께였다. 뉴욕 필하모닉을 이끈 마젤은 거쉬인·드보르자크를 평양 무대의 연주곡으로 골랐다. 브루클린 태생의 작곡가 조지 거쉬인이 파리에서 이방인이 되어 작곡한 ‘파리의 미국인’으로 공연을 시작했다. 뉴욕-파리의 거리와는 비교도 안 되는 뉴욕-평양의 아득한 거리 속에 청중을 던져놨다. 체코의 안토닌 드보르자크에겐 거꾸로 미국이 낯선 땅이었다. 초청을 받아 미국에 머무는 동안 그는 ‘신세계로부터’ 교향곡 2악장을 극도로 처연하게 창조해냈다. 마젤은 동떨어진 문화가 섞이는 방식을 미국이라는 키워드로 재현했다.

서로 다른 두 세계는 음악을 배경으로 부드럽게 마주쳤다. 분위기는 내내 따뜻했다. 막판에 북한 측의 전통악기 주자 6명의 출연 취소를 제외하면 모든 게 잘 돌아갔다. 북한 측은 뉴욕필의 요구에 맞춰 공연장 천장에 음향 반사판을 설치해줬고, 한복을 차려입은 북한 청중은 뉴욕필의 2008-2009 시즌 브로셔를 가슴팍에 안고 돌아갔다.

왜 음악인가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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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필 단원들은 평양에서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들의 연습실까지 찾아가 레슨을 해줬다. 북에는 없는 오케스트라 악보를 나눠주기도 했다. 직전 해의 남북 정상회담에서 훈풍이 이어지고 있었다.

분위기는 석 달 정도 갔다. 같은 해 5월 북은 서해 상에 단거리 미사일을 발사했고 7월엔 금강산에서 관광객이 사망했다. 평양에서 잔뜩 흥분한 채 뉴욕필의 소식을 전했던 겨울은 이제 거대한 환상이었던 것처럼 가물거릴 뿐이다.

지휘자 정명훈은 2011년 평양에 다녀왔고 매년 합동 공연을 하고 싶다고 했다. 이듬해에는 북한·프랑스 연주자를 모아 아리랑을 연주했다. 하지만 1년 후엔 그 무대에 섰던 북한 연주자들의 공개 처형 소식이 있었다.

다음 달 평창 동계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합동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추진되고 있다. 실무 회담에 양측 예술인들이 포함돼 이야기를 나눈다. 절묘하고 아름다운 기획을 기대한다. 하지만 10년 전 뉴욕필 연주곡목의 정교한 스토리텔링조차 지금은 한때의 낭만으로 기억될 뿐이다. 예술교류가 자칫하면 짧은 소동에 그친다는 교훈은 이미 숱하게 얻었다.

김호정 아트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