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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살 엄마의 기다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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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강민석
강민석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강민석 논설위원

강민석 논설위원

내 이름은 김례정, 올해 102살이라오. 하늘이 내려준 나이라는 상수(上壽·100세)를 넘긴 데다 아들은 남들이 부르길 여권 실세라던가. 내 막내아들은 우원식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요. 세상 사람들은 내게 “부러울 게 없겠다”고 합디다. 하지만 모르고 하는 소리요. 나는 자식을 아홉 낳았는데… 지금 두 딸 정혜와 덕혜만 떨어져 북한에서 산다오. 1950년 6·25전쟁 통에 가족이 뿔뿔이 흩어질 때 열한 살 정혜와 여덟 살 덕혜만 남편 고향인 황해도 연백으로 보냈지요. “싫어, 안 갈래.”

부모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울고불고하는 어린 애들을 억지로 떠나보냈는데, 누가 알았겠소. 정혜와 덕혜가 평생의 기다림이요, 상처가 될 줄을. 꿈같은 일도 있었다오. 2010년 내 나이 94살에 북쪽의 딸 정혜가 나를 찾는다지 뭐요. 꿈을 꾸는 것 같았소. 나는 원식이 손을 잡고 금강산으로 떠났지요. 결국… 만났습니다. 60년 만에.

하지만 ‘잃어버린 60년’이란 세월의 강은 메우기 힘든 것이었나 보오. 71살 노인이 된 정혜의 첫마디는 냉정했지요.

“우리, 울지 맙시다.”

정혜는 차돌같이 단단해 보였소. 황해도 연안군에서 직매점 지배인으로 일하면서 받은 훈장과 표창 20여 개를 상봉 테이블에 놓더군요. ‘엄마·아빠에게 버림받은 뒤 이렇게 힘들게 살았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오. 하지만 “울지 맙시다”라는 말은 진심이 아니었소. “절을 드려야 한다”고 벌떡 일어나 큰절을 하더니 열한 살 정혜로 되돌아갔소.

“어머니, 살아계셔서 고맙습니다.”

“너를 떼어놓고 우리끼리만 행복하게 살아서 정말 미안해.”

우리는 볼을 비비면서 눈물이 마를 때까지 울었소. 의료진이 혈압이 급속히 올라가는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려 했지만 정혜를 더 안고 있으려고 거부했소. 그리고 다시 8년이 흘렀구려. 과연 내가 생전에 딸을 볼 수 있겠소?

남북이 판문점 대화 채널을 가동한 9일. 우원식 원내대표에게 102살 노모와 북쪽 누님의 사연을 들었다. 이날 공동합의문에 이산가족 상봉이란 단어는 없었다. 김 할머니 같은 사연을 지닌 사람이 아직 남쪽에만 6만 명인데, 정치가 외면했다. 잔인한 일이다. 평생을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아야 한다는 것. 이 땅의 김 할머니들은 딸을 만날 수 있어야 한다. 이별을 미리 정해놓은 ‘잔인한 만남’이라 해도 기다림 속에 그리움이 한(恨)이 되어 사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나.

강민석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