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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사자성어보다 속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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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남중 기자 중앙일보
김남중 논설위원

김남중 논설위원

“어허 이런, 연목구어가 따로 없구먼.”

‘훈장 할아버지’는 학동들이 얼토당토않은 일을 벌일 때마다 비유를 들며 혀를 찼다. 1970년대 중반까지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의 류씨(柳氏) 집성촌 진골마을엔 서당이 있었다. 한학을 한 훈장 할아버지가 동네 아이들을 사랑채에 모아 놓고 천자문부터 논어·맹자까지 가르쳤다. 마을 어귀에 살았던 인연으로 중학교 입학 전 1년 남짓 서당에 발을 들였다. 명심보감을 떼던 겨울날 송편을 장만해 책거리를 했다. 그런데 떡을 먹자마자 아이들이 손전등을 하나씩 들고 우르르 몰려 나가는 게 아닌가. 초가 처마 틈에서 잠자는 참새를 잡는다고 나선 것이다. 땅거미가 지기도 전이었다. 훈장 할아버지가 연목구어(緣木求魚)에 비유한 까닭이다.

한학자답게 비유에 능했지만 훈장 할아버지는 사자성어보다 속담을 더 자주 사용했다. 폭설이 그친 날이었다. “어허, 개가 맨발로 다닌다고 오뉴월인 줄 아는가 보네.” 토끼 쫓는다며 양은 세숫대야 들고 산으로 올라가는 아이들을 두고서다. 연목구어의 뜻을 제대로 새긴 건 한참 뒤다. 반면에 ‘맨발의 개’ 비유는 듣는 순간 고개를 끄덕였던 기억이 새롭다.

속뜻을 돌려 말하거나 어떤 상황을 비유해서 표현할 때 사자성어가 유용하긴 하다. 그간 남북회담에서 사자성어를 빌린 인사말이 관례가 된 이유다. 2000년 회담에선 고장난명(孤掌難鳴), 일면여구(一面如舊)가 인용됐다. 회담에 임하는 마음가짐이다. 2006년엔 염화시중(拈華示衆)과 우공이산(愚公移山)으로 ‘서로 노력하고 화답하자’는 메시지를 주고받았다. 2007년 언급된 사자성어는 사석위호(射石爲虎)와 부진즉퇴(不進則退)다. 열심해 해서 좋은 성과를 내자는 의미다.

엊그제 열린 남북 고위급 회담은 이런 ‘루틴’을 깼다. 사자성어 대신 속담이 오갔다. “시작이 반” “첫술에 배부르랴”라는 덕담에 “둘이 가야 오래 간다” “마음 가는 곳에 몸이 간다”고 화답했다. 시작이 좋아서였을까. 어쨌거나 회담은 합의를 봤다.

현학적인 사자성어는 때론 부자연스럽다. 잘못 쓰면 낭패 보기 십상이다. 얼마 전 노영민 주중대사가 신임장을 제정하면서 서명한 ‘만절필동(萬折必東)’이 ‘중국을 향한 충성 서약’ 논란을 일으킨 게 한 예다. 중국 고전 속 어려운 말을 외워 되뇌는 게 오늘날에도 교양일지는 의문이다. 우리말, 우리 속담으로 뜻을 전하는 게 더 명확하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다. 엊그제 남북회담을 두고 “사자성어 언급이 없어 모양이 안 났다”는 트집을 아직 듣지 못했다.

김남중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