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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소기업 다니면 ‘모양 빠지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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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최지영 기자 중앙일보
최지영 라이팅 에디터

최지영 라이팅 에디터

지인이 외국계 투자은행(IB)으로부터 최근 수백억원의 투자를 유치한 중소기업 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널리 알려진 업체는 아니다. 그는 입사 후 몇 달 동안 이 투자금을 쏟아 부을 신사업을 구상하는 대신 대학교를 돌아다니느라 바빴다. 취업 설명회 때문이다.

“우리 회사에 투자한 IB와 공동으로 소규모 취업 설명회를 했는데, 그럴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IB 관계자가 ‘이 중소기업에 투자한 이유는 장래성이 있어서’라고 하면 그나마 취준생들이 귀를 기울이거든요.”

이 중소기업은 매우 예외적인 경우다. 많은 중기엔 취업 설명회를 할 기회도 없고, 회사의 비전을 보증해 주는 IB도 없으며, 설명회를 해도 취준생들이 지원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취재한 한 중소기업의 사장은 당시 “꼭 회사 이름을 지면에 내 달라”고 사정사정했다. 탄탄한 이 회사는 고급 타일을 세계 시장에 수출하고 있었는데, 회사의 성장성과는 무관하게 인재를 뽑지 못하고 있어 회사를 알리고 싶다는 것이었다. “우리같이 한창 크는 회사일수록 사람이 더 필요한데, 꼭 뽑아 쓰고 싶은 사람은 한해 두어 명도 지원하지 않아요.” 사장의 하소연이었다.

중소기업에 취업하지 않는 걸 두고 꼭 취준생을 뭐라고 할 수만도 없다. 대기업이나 공공기관을 노리는 이들에게 “왜 비전 있는 중소기업에 도전하지 않냐”고 물어보면 “중기에 다니면 연애하기 힘들고, 결혼하기도 힘들다. 모양 빠진다”는 답이 돌아온다.

정부가 최근 발표한 관광 종합대책 중 하나인 ‘근로자 휴가지원’ 제도도 중기 직원에겐 그다지 기쁜 소식이 아니다. 내년부터 휴가비를 근로자 50%, 기업 25%, 정부 25% 비율로 정부가 최대 10만원 지원한다. 중기 근로자에겐 남의 떡이 될 공산이 커 보인다. 기업과 근로자가 돈을 내야 정부가 매칭펀드 형태로 낸다는 점에서 형편이 넉넉한 대기업 위주로 진행될 개연성이 크다.

안 그래도 중소기업중앙회 등 중기 경영자들을 중심으로 “근로시간 단축이 시행돼도 영세 기업엔 8시간 특별 연장근로를 허용해 달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참이다. 휴가는 짧고, 휴가비도 적고, 일하는 시간은 길다면 도대체 누가 중소기업에 와서 일하려고 할까. 현 정부가 강조하는 ‘워라밸(워크&라이프 밸런스)’은 중기 근로자에겐 남의 나라 얘기처럼 들릴 것이다.

정부는 ‘소득주도 성장’이 자리 잡으면 중소기업 사정이 나아져 일자리 미스매칭도 자연스레 줄어들 거라고 믿는 듯하다. 순진한 생각이다. 전망 있고, 비전 있는 곳에도 인재가 오지 않는 현 상황은 중소기업과 한국 경제의 목을 죄고 있다. 중기 경영자뿐 아니라 중기 직원의 기를 살려 줄 수 있는 섬세한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다.

최지영 라이팅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