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시평

문 대통령의 방중과 박지원의 『열하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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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장 훈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장 훈 중앙일보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

정치학자들이 모여 올해의 인물을 선정한다면? 촛불집회를 거쳐 새로이 정부를 이끌고 있는 문재인 대통령이 단연 그 주인공일 것이다. 민주주의의 새 장을 연 문 대통령을 중심으로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한편으로는 설렘과 새 출발의 시간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북핵 위기가 우리를 짓누른 혼돈의 시간이기도 했다.

“당대의 일 섣불리 이야기 말고 #역대의 역사 사실을 거론하되 #최근 사정은 다그치지 말아야” #시 주석의 표정, 시선으로부터 #3불 의지와 본심을 읽어내길

밝은 면부터 돌아보자. 지난 5월 봄이 완연하던 무렵 우리는 부패한 정부, 무능한 정당들을 심판하고 민주주의의 새 출발을 자축했다. 인권변호사 경력을 지닌 문 대통령의 취임은 전 세계적인 민주주의 퇴조 흐름과는 큰 대조를 이뤘다.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현상, 영국의 브렉시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초장기 집권 등 민주주의의 경고음이 곳곳에서 울리는 와중에 이 땅에선 인권·소통·경청을 강조하는 새 대통령이 취임했다.

하지만 봄의 축제는 잠깐이었다. 여름과 가을 내내 우리는 북한 핵 위협과 미사일 도발 속에서 최악의 계절을 거쳐 왔다. 이제 한겨울 추위 속에서 문 대통령은 녹록지 않은 외교전을 치르고 있다. 고고도미사일방어(THAAD·사드) 체계 배치와 북한의 도발을 고리로 미국·중국이 펼치는 한반도 그레이트 게임의 와중에서 우리의 평화와 안전, 국익을 확보해야 하는 문 대통령의 어깨는 무겁다.

건조하고 삭막한 북쪽의 수도 베이징에서 마주하고 있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가늠하기 어려운 깊은 무표정과 긴 호흡의 전략은 소탈한 인권변호사의 길을 걸어온 문 대통령의 세계관과 쉽게 어울리지 않는다. 문 대통령은 평등·인권·정의 등으로 집약되는 한국 민주주의의 리더이지만 민주적 가치가 강대국과의 외교에서 반드시 마법의 용해제로 작용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정치 체제 안에서 사회경제적 평등을 이루기 어려운 만큼이나 국가 간 외교 관계에서 대등한 관계는 드물다. “전략적 협력 동반자”라는 외교적 수사를 넘어 강대국 중국과 우리가 ‘정의로운 동반자 관계’를 가꿔 가기도 그만큼 어렵다.

장훈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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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도 우리는 거대 중국과 이웃하며 오랜 역사를 쌓아 왔고 그 역사 속에는 우리 선인들의 깊은 지혜와 사상적 분투가 담겨 있다. 18세기 후반 실학파의 거두,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당시의 세계 최강국 중국을 상대하던 선인의 지혜가 풍부하게 담겨 있는 지식 창고다. 44세의 혈기 방장한 나이에 조선 유학의 관성적 사고를 거부하던 게릴라 지식인, 박지원은 청나라 건륭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끼어 1780년 베이징으로 향했다. 막상 인사를 받아야 할 건륭제는 베이징에 있지 않고(문 대통령이 베이징에 도착하는 날 시 주석이 베이징을 비운 것은 우연의 일치인가?) 북쪽의 변방 열하에 머문다기에 다시 길을 오가며 기록한 관찰기가 박지원의 『열하일기』다.

천하의 형세를 살핀다는 『열하일기』 ‘심세편(審勢編)’에서 박지원은 문 대통령이 숙고할 만한 충고들을 내놓는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부분 외교적 언사에 익숙하지 못해, 혹 어려운 것을 묻는 데 급급하거나 당대의 일을 섣불리 이야기”하는데 이는 섬세하지 못한 일이며 “역대의 역사 사실을 거론하되 최근 사정에 대해서는 다그치지 말아야 한다”고 박지원은 주문하고 있다. 달리 말해 박지원은 문 대통령에게 사드 배치를 둘러싼 우리의 국내 사정(‘당대의 일’)을 굳이 일일이 설명하기보다는 오히려 1950년대 이후 지속돼 온 한·미 동맹의 역사와 대북 도발 억제의 역사를 강조하는 게 낫다고 권유하는 셈이다.

이어 박지원은 어떤 국제정치학 교과서에도 찾아볼 수 없는 날카로운 방책을 제시한다. “겸손한 마음으로… 청하여 마음 놓고 이야기를 터놓도록 유도하고, 겉으로는 잘 모르는 것처럼 가장해서 그들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든다면 그들의 눈썹 한 번 움직이는 데서도 참과 거짓을 볼 수 있을 것이요, 웃고 이야기하는 동안에도 실정을 능히 탐지해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해 사드 관련 3불(不)이라든지, 미국의 북한 해상봉쇄 움직임과 유엔 대북제재결의안의 관계와 같은 민감하고 복잡한 이슈들에 대해 굳이 상세한 설명을 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상대의 답답함을 유발하라는 것이다. 동시에 시 주석의 표정·시선으로부터 이른바 3불에 대한 중국의 실질적 의지, 북한을 보는 중국의 진심을 읽어 낼 수 있다는 것이 박지원의 충고였다.

뼛속까지 실용주의자였던 박지원은 끝으로 이렇게 외친다. “천하를 통치하는 사람은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국가를 두텁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열하일기』 중 ‘일신수필’) 지난봄, 안으로는 민주주의의 새 장을 열었던 문 대통령이 바깥 무대에서 우리의 삶을 지키기 위한 짐은 거칠고도 무겁다.

장 훈 본사 칼럼니스트·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