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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러시아가 보내는 신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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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복거일 소설가

복거일 소설가

한반도 주변의 강대국들 가운데 근년에 우리의 관심을 덜 끈 나라는 러시아다. 다른 세 나라의 영향이 크고 직접적이라는 사정 때문이지만 살필수록 문제적임이 드러난다. 국제사회는 하나의 체계이므로 러시아의 정책과 행동은 먼 곳에서 나와도 한반도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미국에 러시아는 당장의 위협 #중국도 곳곳에서 러시아 밀어내 #한국에 중국보다 러시아가 나은 #파트너라는 속삭임 빈말 아니다 #시베리아 개발 참여는 위험하나 #정치·경제 새 지평 열릴 수 있어

지난 9월 14일부터 일주일 동안 러시아는 벨라루스에서 서방을 겨냥한 ‘자파드 훈련’을 실시했다. 벨라루스는 우크라이나, 폴란드, 리투아니아 및 라트비아와 이웃해 전략적으로 중요하다. 훈련이 끝난 뒤 러시아군이 벨라루스에서 철수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온 세계의 이목이 러시아군의 훈련 준비에 쏠린 9월 3일 북한이 6차 핵실험을 한 것을 우리는 우연의 일치로 넘길 수 없다.

군사력만을 따지면 러시아는 미국 다음으로 강하다. 그리고 그런 군사력을 바탕으로 곳곳에서 분쟁을 일으킨다. 패권국가 미국에 중국은 미래의 위협이지만 러시아는 당장의 위협이다.

특히 러시아의 크리미아 합병은 풀릴 수 없는 문제다. 서방은 러시아의 불법 합병을 용인할 수 없다. 러시아인들이 절대 다수인 크리미아의 합병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은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으로선 거기서 물러나는 순간 실각한다. 푸틴의 후계자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무력으로 대응할 수 없는 서방은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응징했고, 궁지에 몰린 푸틴은 중국에 더욱 기대게 됐다. 이런 정책은 장기적으로 러시아에 해롭다. 이웃 중국이 강대해지면 러시아는 위축될 수밖에 없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일대일로(一帶一路)’라는 해외 팽창 정책을 추구하면서 중국은 곳곳에서 러시아를 밀어내고 있다. 특히 소련의 해체로 독립한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거의 다 중국으로 넘어갔다. 전통적으로 러시아의 영향권이었던 동유럽에서도 중국은 공식적 협력기구를 설립했다.

중앙시평 12/16

중앙시평 12/16

중국에 대해 우위를 지녀온 군사 기술에서도 러시아는 중국에 추월당하리라고 체념한 듯하다. 2015년 11월 러시아가 중국에 최신 수호이 전투기를 팔기로 했다는 소식은 충격적이었다. 중국이 역공학(reverse engineering)으로 단숨에 러시아의 최신 군사 기술들을 습득할 터였다. 군사 기술에서도 어차피 중국에 추월당할 터이니 할 수 있을 때 무기 장사를 하겠다는 속셈이라고 얼마 전에 러시아 스스로 밝혔다.

러시아는 시베리아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해 왔다. 시베리아는 땅은 광활한데 인구가 아주 적다. 그래서 만주의 중국인들이 시베리아로 밀고 들어오는 상황을 러시아는 줄곧 경계해 왔다.

그런 위협에 대한 방책으로는 한국인들의 협력과 이주가 거론돼 왔다. 볼셰비키 혁명 시절 일본군이 연해주를 점령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두 나라가 싸웠고 지금도 일본과 북방 도서에 대한 영유권 협상을 하는 터라, 일본보다는 덜 위협적인 한국과의 협력을 바란다고 러시아 사람들은 비공식적으로 얘기해 왔다.

얼마 전 방한한 러시아 ‘발다이클럽’의 의장이 한국에 러시아가 중국보다 나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발다이클럽은 옛 소련 ‘코민테른’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형식적으로는 민간 연구소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푸틴 정권이 힘을 실어 주는 러시아의 공식 기구다. 이런 기구의 책임자가 비공식적으로만 나돌던 협력방안을 공식화한 것은 중요한 신호다.

우리가 그런 신호에 적절하게 반응하는 일은 보기보다 훨씬 중요하다. 비록 비밀정보기관이 권력을 쥔 압제적 국가지만, 그래도 공산주의를 버린 러시아는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보다는 우리가 안정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러시아와의 협력은 당장 북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된다. 요즈음 북한 정권은 중국에 대한 의존을 줄이는 길로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시도한다. 그들은 1960년대 북한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움직일 공간을 찾은 경험을 본받으려 한다. 북한이 얻으려는 그런 공간을 줄이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러시아와 보다 긴밀히 협력해야 한다. 시베리아 개발에 참여하는 일은 위험이 무척 크지만 조심스럽게 접근한다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새로운 지평이 열릴 수 있다.

무엇보다도 하루가 멀다 하고 중국이 우리를 위협하고 모욕하는 상황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수 있다. 러시아가 공식적으로 제안했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그 제안을 받아들여 두 나라의 공동 이익을 늘리는 길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

복거일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