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타인과 달라지기 위해 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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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대체 불가능한 작가. 이런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만큼 개성적인 세계를 선보여온 배수아(52)씨가 새 소설집을 냈다. 2012년부터 발표한 단편 7편을 모은 『뱀과 물』(문학동네)인데, 역시, 과연, 같은 감탄사를 부른다. 배씨 소설의 특징으로 거론돼온 온갖 요소들이 치명적인 농도로 녹아 있어서다. 표제작 '뱀과 물'은 그중 압권이다. '문자화된 악몽과 환상'이라고 할 만한데, 그래서 느슨한 독서를 허락하지 않는다. 정신 나간 문답처럼 인물 간의 대화는 논리의 그물을 수시로 빠져나가고, 사건은 한곳으로 수렴되기보다 정처 없이 흩어진다. 무엇보다 인물이 단일하지 않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같은 시공간 안에서 상대가 누구인지 모른 채 마주쳐 부대낀다.

7년 만에 꿈과 환상이 뒤섞인 소설집 『뱀과 물』을 낸 배수아씨. 오른쪽은 소설집 표지. 배씨가 추천한 체코 사진작가 프란티셰크 드르티콜의 사진을 썼다. 성숙한 여인 같기도, 앳된 소녀처럼도 보인다. 배씨는 ’여인이 아니라 소녀로 생각한다“고 했다. [우상조 기자]

7년 만에 꿈과 환상이 뒤섞인 소설집 『뱀과 물』을 낸 배수아씨. 오른쪽은 소설집 표지. 배씨가 추천한 체코 사진작가 프란티셰크 드르티콜의 사진을 썼다. 성숙한 여인 같기도, 앳된 소녀처럼도 보인다. 배씨는 ’여인이 아니라 소녀로 생각한다“고 했다. [우상조 기자]

당연히 배씨 소설은 실감 나는 세상을 보여주거나 하지 않는다. 그의 소설을 읽는 일은 과감하게 인간 심연을 드러내는 작가 정신을 읽는 일이다. 우리는 이성과 합리만큼이나 도취와 당착에 사로잡힌 존재들이다. 22일 배씨를 만났다. 날씨, 계절, 운동 얘기로 시작했다. 그는 요가를 독학으로 배워 집에서 혼자 하는데, 강좌나 클래스에 등록해 무언가 배우는 일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했다.

『뱀과 물』 출간한 소설가 배수아 #현실과 꿈 뒤섞인 단편 7편 모아 #“무계획적이고 직관에 기댄 소설 #퇴고는 한번, 미문도 싫어해”

틀에 짜 맞춰진 환경을 싫어하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 대학교를 졸업하는 날이었다. 뭔가를 열심히 하는 건 나랑은 안 어울린다.”
소설은 열심히 쓰지 않나.
“열심히 안 쓴다. 즐기면서 쓴다.”
작품 쓸 때 고통스럽다는 작가들이 있다.
“아니, 전혀. 힘들면 안 쓰면 된다. 소설 쓰기를 거리 청소와는 다른 정신적 고뇌의 엄청난 여정인 것처럼 표현하는 경우도 봤는데, 그건 아닌 것 같다.”
어떻게 쓰는 건지 궁금하다.
“나는 글쓰기 계획이라는 게 없다. 치밀하게 플롯을 짜야 하는 스릴러나 지켜야 할 장르적인 특징을 가진 소설이 아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쓰는 편이다.”

배씨는 일단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으면 며칠이고 생각에 빠진다고 했다. 스토리를 생각하는 게 아니다. 나는 지금 소설을 쓴다, 그렇게 생각만 하다가 가령 어느 날 꿈속에서 이상한 문장을 마주치면 잠에서 깬 다음 그 문장을 적어두는데 그 문장에서 소설이 시작되는 식이라고 했다.

『뱀과 물』

『뱀과 물』

그런 문장을 못 만나면 어떻게 되나.
“문장이 아닐 때도 있다. 우연히 마주친 어떤 감각이나 사람, 장소가 모티프가 돼 소설이 시작되기도 한다. 그런 마주침을 위한 모드 전환의 과정, 소설의 모티프가 내 몸에 잘 들어올 수 있게 만드는 그런 단계가 내게는 필요한데, 그게 찾아올 때까지 몸을 익힌다고 할까, 기다리는 거다.”
이번 소설집 『뱀과 물』의 해설 제목이 ‘영원한 샤먼의 노래’인데, 아주 틀린 소리는 아닌 것 같다.
“그렇게 말하니 내가 샤먼인 것 같다.”
문장을 많이 다듬는 편인가.
“미문(美文)을 싫어한다. (퇴고는?) 한 번 정도? 많이 다듬지는 않는다. 무계획적이고 즉흥적인 직관에 기대 소설을 쓰다 보니 앞뒤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장면이 가끔 생긴다. 가령 앞에서는 스커트를 입고 있었는데, 나중에 바지를 벗는다든지 하면 그런 건 고쳐야 한다.”
표제작 ‘뱀과 물’이 특히 난해하다.
“그 소설은 모든 게 불분명한 작품이다.

주인공이 경험한 모든 시간대가 2차원 평면에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상황을 상상한 작품이다. 교사인 김길라는 환상 속에서 과거 엄마 뱃속의 태아가 되기도 하고, 어린 시절 죽어가는 자신을 방치하기도 한다. 그런 작품이다 보니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는 서사를 구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작품에도 모티프가 있었겠다.
“소설 제목의 ‘뱀과 물’은 나의 어린 시절의 악몽과 관련 있다. 어떤 이미지도 함께 살리고 싶었는데, 텅 빈 학교를 전학생이 찾아온 장면이었다.”
인생에 대한 통찰이 담긴 작품인가.
“내 소설에 철학은 없다. 어떤 감각을 언어로 표현하고 싶었던 거지 인생관이나 심오한 사상, 철학, 그런 얘기를 한 게 아니다.”
소설은 주로 독일에서 쓴다고 들었다. 낯선 환경에서 소설이 잘 써지나.(배씨는 1년에 두 달 정도 독일에 체류한다. 한국에 있을 때는 독일어 소설 번역을 한다)
“외국에서는 감각이 새로워진다. 감각이야말로 육체의 옷인데, 굉장히 잘 입어야 한다. 그게 글을 좌우한다. 나는 집에서 소설 쓰는 게 도대체 상상이 잘 안 된다.”
페미니즘적인 요소도 보인다.
“소설 쓸 때 의도적으로 여성 주인공을 선택해 가족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내 소설의 여성 주인공은 대부분 가족이 없거나 가족으로부터 독립돼 있다. 그래서 가족에 의해 운명이 좌우되지 않는다. 그걸 페미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는데, 그런 여성 서사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있다.”
‘너무 많은 독자가 내 소설을 읽는다면 부담스러울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는데.
“나는 소수성을 지향한다. 드물지만 내 소설을 읽고 좋아하는 독자를 만나면 당연히 반갑고 기쁘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글은 언유주얼(이상한 글)인데, 너무 많은 사람이 좋아한다면, 물론 지금 전혀 그렇지 않지만, 뭔가 모순이잖나. 그런 상황을 경계한다는 얘기를 한 거다.”

배씨는 “타인과 나 자신을 변별하기 위해 소설을 쓴다”고 했다. 그런 배씨에 공감해 이번 소설집은 벌써 2쇄를 찍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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