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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패러다임 필요한 한국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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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우리나라의 잠재성장률은 1980년대 7.5%, 90년대 6.2%에서 2000년대 5% 수준으로 계속 하락하고 있다. 노동시장으로의 신규 인력 유입이 둔화되고, 자본의 증가 속도도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비록 성장하더라도 고용이 예전만큼 증가하지 않는 것이 큰 문제다. 산업별 고용 유발계수를 보면 90년대는 최종 수요가 10억원 늘어나는 경우 26.8명의 고용을 유발하는 효과가 있었으나 2000년대는 12.4명으로 축소됐다. 이에 따라 이른바 '고용 없는 성장(jobless growth)'에 대한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특히 유의해야 할 구조 변화는 중산층의 감소와 양극화 현상이다. 96년에는 중산층이 전체의 67.5%를 차지했으나 2004년에는 63.9%로 줄었으며 상대적으로 빈곤층의 숫자는 늘었다.

한국 경제가 겪고 있는 문제는 대량생산 다수고용의 산업사회로부터 고품질 소수생산을 특징으로 하는 지식정보화 사회로 이행함에 따라 나타나는 현상으로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은 선진국에서 길게는 100년 넘는 기간 중에 진행된 경제구조 변화를 10~30년 내에 적응해야 하며, 세계경제 속에서 기술적 우위를 확보한 선진국과 빠른 속도로 추격하는 중국 등 개발도상국의 틈바구니에서 경쟁해야 하는 처지에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경제가 향후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연구개발(R&D) 투자와 기술혁신으로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일이 중요하다. 앞으로는 공장을 짓고 기계를 설치하는 전통적인 설비투자보다는 새로운 기술의 특허, 우수한 품질의 제품이나 디자인 개발이 성장잠재력을 좌우하는 관건이다. 80년대 후반 이래 고정자본 중에서 설비투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이에 반해 특허권 상표권 등 무형 고정자산은 늘고 있는데 그 중요성이 더 커질 것이다.

국제무역에 있어서는 '산업 내 분업'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 한국은 전자산업을 맡고, 중국은 섬유산업을 특화하는 식의 산업 간 분업이 아니라 한 산업 내의 가치 사슬(R&D-조립-마케팅-물류 등) 중에서 어떤 부분을 한국이 담당할 것인가 하는 '산업 내 분업'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최근 경향을 보면 전자.철강.자동차 등 한국과 중국의 주력 산업이 같아지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상황에서 한국은 R&D, 부품 개발, 마케팅 등 고부가가치 기능에 특화하는 전략을 채택해야 한다.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일은 성장을 위해, 그리고 분배 개선을 위해서도 중요하다. 기본적으로는 시장 기능을 통해 일자리가 만들어져야 하지만 우리의 경제구조를 감안할 때 향후 지식기반 서비스업과 사회 서비스업에서 일자리를 늘릴 수 있는 기회가 많다고 본다. 영화.방송.게임 등 문화산업은 주 5일 근무와 지상파 위성방송 등 기술 발달과 한류 열풍으로 수요가 늘어날 것이다. 교육.의료.공공행정 등 사회 서비스의 비중도 한국이 12%인 데 비해 선진국은 20% 이상으로 앞으로 일자리를 늘릴 수 있는 분야다.

한정된 노동인구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현재 53% 수준인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을 높여야 한다. 이를 위해 보육시설 확충 등 직장과 가정을 양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줄 필요가 있다. 고령화 시대 노인의 고용 확대를 위해 정년 연장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으며 임금피크제를 확산해야 한다.

우리나라 고용 인구의 87%를 차지하는 중소기업에 대한 정책 변화도 필요하다. 그동안 융자 위주의 금융지원을 혁신형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투자지원으로 전환할 필요가 있으며 이를 위해 정부가 모태펀드 조성을 확대하고 민간투자에 대한 세제 인센티브를 부여해야 한다. 현재 제조업 기준 근로자 300명 또는 자본금 80억원 이하 중 하나의 요건을 충족하면 중소기업으로 간주해 많은 중견기업을 지원 대상에 포함시키고 있는데, 중소기업 범위를 축소하는 게 바람직하다.

한국 경제 경쟁력의 바탕인 인적자본 양성을 위해 교육시스템을 양질의 인력을 공급할 있는 체제로 개편해야 한다. 정부는 산업 수요 변화에 따른 업종별.유형별 인력 수급 전망을 제공하고 대학은 이를 토대로 필요한 인재를 경쟁을 통해 배출해야 한다. 산업체에서 활용되는 지식과 기술의 생명주기가 점차 짧아짐에 따라 근로자를 지속적으로 교육하고 훈련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 성인들의 평생학습 참여율은 23%로 선진국의 44%에 비해 크게 뒤떨어지는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전문대학이나 대학에서 외국의 지역전문대학(community college)같이 성인 근로자에 대한 직업능력 개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끝으로 자립 능력이 부족한 소외계층을 위한 정부의 역할을 강조하고 싶다. 한국의 사회안전망은 외환위기를 겪고 난 이후 도입된 제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선진국은 물론 개도국에 비해서도 뒤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기초생활보장.건강보험.국민연금 등의 복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정부의 지출은 앞으로 늘어나야 한다. 다만 제도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한 대책도 함께 실시할 필요가 있는데 예를 들어 근로소득보전세제(EITC)를 도입해 복지 지원과 생산 활동을 연계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이 있다.

또한 정부가 지급하는 쿠폰으로 수혜자가 자기 실정에 맞는 직업훈련이나 서비스를 구입하는 바우처 제도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든든한 사회안전망이 갈등을 줄이고 사회적 활력을 소생시켜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성장잠재력을 높이는 데도 기여한다는 인식을 확산시키는 일이다.

현정택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