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문정책의 새 기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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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문교부가 14일 「한글맞춤법 및 표준어규정 개정안」 을 최종 확정, 공표했다.
정부가 시대에 따라 변하는 우리말과 글의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대폭 수용해서 반세기만에 국어의 통일된 사용규정을 바꿔 정한 점에서 「국어혁명」 이라고 할만한 의미를 느끼게 된다.
현행의 맞춤법은 1933년 조선어학회가 제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 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고 현행의 표준어 또한 1936년 조선어학회가 사정, 공표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의 규정을 따른 것이었다.
그 규정들은 물론 일제하의 모진 핍박속에서도 나라의 말과 글을 지키려고 애썼던 우리 선인들의 갸륵한 뜻과 정성이 담긴 노작임에 틀림없으나 언어는 역사와 더불어 변한다는 보편적인 원리에 따라 우리말의 변화에 그대로 적용되기는 어려운 문제들이 노출된바 있었다.
맞춤법의 경우 규정은 있으나 실용상 준수되지 않는 것이 생기고 규정의 미비로 표기의 혼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지금엔 전혀 필요하지 않은 조항이 생겨나 이를 개정 혹은 폐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표준어의 경우도 생활의 급격한 변화로 지금은 쓰여지지 않는 말도 생기고 말소리의 변화로 현실적으로 표준어임 수 없는 것도 생겨났다.
결국 말과 글의 사용규정이 현실에 동떨어져서는 안되겠다는 주장들이 모여 정부의 결단이 이루어졌다.
특히 이번 문교부의 결정은 작년에 학술원부설 국어연구소가 그동안 70여회의 심의회의와 전국적인 설문조사를 거쳐 발표했던 「개정시안」을 다시 일반공개를 통해 널리 비판을 받은 후 최종안으로 마무리한 것을 확정한 점에서 높이 평가할만하다.
개정착수 l7년만에「한글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정책결정관행에 비추어서도 커다란 모범이 될만하다.
이로써 우리는 그간 우리말과 글의 사용 현실에서 야기됐던 각가지 혼란을 해소할 수 있게되었다.
국어사전마다 제각기 멋대로 내세웠던 표준말과 표준발음이 하나로 통일됨으로써 일선학교의 교육현장에서 겪게되었던 학생들의 당황과 교사들의 당혹을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 같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새 규정은 여전히 문제를 안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맞춤법과 표준어규정이 현실을 지나치게 수용, 소리나는대로 적는다는 원칙을 강조한 나머지 언어의 또 하나의 원칙인 「어원을 밝혀 적거나 어법을 지킨다」는 원칙에 혼란을 일으킨다는 우려다. 현실 적응의 원칙은 때때로 언어의 안정성을 해치곤 한다.
동음이의어의 양산과 글자의 시각적 의미전달 기능감소로 의미의 혼란이 발생하리란 우려도 있다.
또 그간 반세기동안 출판, 사용돼온 방대한 양의 사전과 출판물이 폐품화될 뿐아니라 국어교육에도 당분간 혼란이 오리란 우려도 있다.
이번 「국어혁명」은 우리말과 글의 가치와 효용을 높이기 위해 불가피하게 겪어야할 과정이기는 하다. 이 시점에서 그 과정의 혼란과 손실을 최소화하고 단기화하는 것은 오로지 우리의 지혜와 노력에 달렸다는 점도 인식해야겠다.
더 중요한 것은 나라의 말과 글은 국민의 정신생활과 직결되는 문제인 만큼 정부가 이번 「규정개정」에 만족하지 말고 계속 어문정책에 대한 소신을 가지고 장기적 투자와 연구를 지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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