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대통령이 기억할 시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5면

고정애 기자 중앙일보
고정애 정치부 차장

고정애 정치부 차장

지난 15일 밤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했다는 발언이다.

“포항으로 급파된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의 보고가 (수능 연기에) 결정적이었다고 한다. 김 장관은 마침 관계기관 회의 중이던 김상곤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에게 보고를 전달했고 이 회의에서 오후 7시30분 수능 연기가 결정됐다. 오후 8시 문재인 대통령에게 보고됐고, 8시20분 김 부총리가 발표했다.”

김부겸 장관이 부각된 게 그의 기여 때문인지, 장차 정치적 고려 때문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오히려 또렷이 들린 건 그 이후였다. ‘김 부총리 회의서 결정→대통령 보고→발표’란 부분이다. “이런 시시콜콜한 것까지 청와대가 챙기나”란 소리가 나오는 마당에 최소 수백만 명의 이해가 걸린, 정권 초반의 기세를 좌우할 일을 김 부총리 회의에서 결정한다? 난감한 말이다. 결국 청와대가, 대통령이 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청와대는 대통령의 역할을 줄여 발표했다. 초유의 수능 연기란 결정 부담을 대통령으로부터 분산시키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주변에선 이렇게 마음 쓸 정도로 대통령은 줄곧 결정한다. 고뇌의 시간도 보낸다. 누군가는 손해 보고 누군가는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어서다. 해리 트루먼의 경구(‘The Buck Stops Here’-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결정한다)대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을 두고 “역사의 기록에는 잘못된 선택으로 남을 테지만 대통령을 맡은 사람으로서 회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썼다. 이후 김선일씨 피살사건이 나자 “내 탓인가”라고 자책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한두 명(우리 국민) 인명 피해가 있을 수 있다”는 보고에도 소말리아 해적으로부터 삼호주얼리호를 구출하도록 지시했다. 결정 이후엔 “그저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토로했다.

문 대통령도 지금 무탈하기만 간구할 게다. 이번 결정은 사후적으로 보면 불가피했다. 당시엔 안 그랬을 게다. 몇 시간여 쏟아져 들어오는 엇갈린 정보에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김부겸 장관을 ‘급파’했을 정도라니. 문 대통령이 당시를 오래 곱씹고 기억했으면 한다. 마음과 귀를 열고 최선의 길을 찾았던 시간 말이다. 이전 결정에서 한쪽으로 더 쏠린 듯한 모습을 보여서 하는 얘기다.

고정애 정치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