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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현기의 시시각각

자사고·외고는 적폐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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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뉴욕의 한 공립고에 ‘일일 교장’으로 초대받은 도널드 트럼프. 리무진에서 내리자마자 학생들을 향해 “나이키 신발 하나씩 사주마”라 외쳤다. 그러곤 휴지를 손에 쥐더니 계단 손잡이를 잡고 올라갔다. 학생들 손자국과 접촉하기 싫어서다. 학교를 떠나며 그는 말했다. “공립학교 참 힘들구먼. 내가 200만 달러(약 23억원) 기부하리다.” 그 자리에서 체크(수표)를 끊어 줬다. 하지만 다음날 비서를 통해 체크를 취소했다. 새롭게 끊어 준 액수는 200달러(약 23만원). 1990년대 말 이야기다.

“교육 특권층” 규정할 특권 누구도 없어 #일반고 현실 개선, 어렵지만 우선해야

떠오른 생각을 바로 언행으로 옮기지 않으면 못 배기는 트럼프의 즉흥적 성격을 비난하며 워싱턴 인사들이 종종 인용하는 스토리다. 하지만 신기한 건 그 누구도 이 스토리를 자녀 5명을 모두 명문 사립 중·고교에 보낸 트럼프의 ‘공립학교 능멸’로 연결하진 않는다는 것.

사실 지난 100년 동안 20명의 미국 대통령 중 자녀를 공립학교에 보낸 건 77년 지미 카터가 유일하다. 각종 차별에 맞선 오바마조차 두 딸을 연간 수업료 4만 달러(약 4600만원)가 넘는 명문 사립에 보냈다. 헤리티지 재단에 따르면 미 상원의원 44%는 자녀를 사립 초·중·고교에 보낸다. 하원은 38%다. 일반인의 수십 배 수준이다. 하지만 뭐라 하는 사람 없다. “학교를 선택하는 건 그들의 권리이자 능력”이란 사고 때문이다. 모든 이가 ‘수업료 4만 달러’의 눈높이가 아닌 게다. 좋고 나쁘고를 떠나 철저한 ‘교육 자본주의’다.

일본도 마찬가지. 특파원 재임 당시 한 일본인 지인이 아들을 게이오 유치원·초등학교에 보내는 데 연달아 실패하자 고민하는 걸 봤다. 면접 때 부모의 경제적 능력 항목에서 떨어진 것 같다는 한탄이었다. 그런데 그가 제도 탓을 하지 않고 ‘게이오 고교 보내기 9개년 계획’을 세우는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아마 우리 같았으면 학부모다 정치권 모두 들고일어나 그 학교 존폐를 위협했을 것이다.

최근 국감에서 야당의원들이 “자사고·외고는 적폐이니 사회에서 없어져야 한다고 (현 정권은) 생각한다. 그럼 이를 선택한 학생은 적폐이고 부모는 적폐부모가 되냐”고 묻는 장면을 봤다. 더 기가 막힌 건 “특혜·특권이라는 교육 불평등을 제공하는 자사고·외고 시스템은 우리 교육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교육감의 답변.

곰곰이 생각해 보자. 대한민국이 사회주의를 택하지 않는 한 애초부터 완전 평등한 환경에서 경쟁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교육 사회주의’의 길이 옳은 것일까. 그게 옳다면 왜 미국·일본은 그 길을 가지 않았을까. 애당초 우리 국민이 “자사고·외고는 특권층”이라 규정할 수 있는 특권을 그들에게 부여한 건 맞나.

가진 거라곤 사람뿐인 한국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헤쳐 갈 재주 많고 매력적인 인재를 키워 내는 게 교육의 핵심이다. 진보의 가치 운운하며 자사고·외고 폐지를 외치는 ‘쉬운 일’만 하려 할 게 아니라 한 반에 몇 명을 제외하곤 다 엎드려 자는 일반고의 현실을 개선하는 ‘어려운 일’을 먼저 해야 한다. 그게 제대로 된 순서이고 본질이다. 그걸 거꾸로 하는 자본주의 선진국은 없다. 며칠 전 거미 한 마리를 죽이려고 화염방사기를 분사하는 바람에 집을 태워먹은,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다 태운다’는 속담이 실제 뉴스가 된 게 있었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교육열을 본받아야 한다”고 외쳤던 오바마 전 미 대통령. 자사고·외고 폐지 운운하는 지금 우리 모습을 보며 뭐라 할까. 아마도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싶다. “글쎄, 즉흥적인 트럼프라도 그렇게는 안 할 걸.”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