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세계에 ‘북과 거래 끊어라’ … 이란식 고사작전 착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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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북미국장 이 올레그 부르미스트로프 러시아 한반도 특임대사와 회담을 위해 26일 브누코보 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모스크바=연합뉴스]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북미국장 이 올레그 부르미스트로프 러시아 한반도 특임대사와 회담을 위해 26일 브누코보 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모스크바=연합뉴스]

미국이 북한을 상대로 ‘이란식 고사(枯死)작전’에 본격 착수했다.

북한 은행 10곳, 개인 26명 제재 #국제금융거래망에서 퇴출 나서 #2013년 이란은 경제난에 손들어 #트럼프 정부 들어 한국 독자 제재 0 #미국 제재에 “평가한다” 입장만 내

미 재무부는 26일(현지시간) 농업개발은행 등 북한 은행 10곳과 개인 26명을 새로 제재 대상에 올렸다. 북한 금융거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국을 사실상 염두에 둔 세컨더리 보이콧(북한과 정상적 거래를 하는 제3국 기관·개인도 제재) 실행을 위한 첫 단계다.

① 중국 겨냥한 세컨더리 보이콧 예고탄=제재 대상에 오른 북한 은행과 거래한 모든 미국인과 미국 기관은 미 국내법에 따라 처벌을 받게 된다. 이번에는 북한만 타깃으로 했지만, 미국은 이들과 거래하는 다른 나라의 기관이나 개인도 추가로 제재한다는 방침이다. 제재 대상에 오른 북한 은행들은 사실상 국제 금융거래망에서 퇴출된 셈이다.

제재 명단에 오른 은행은 농업개발은행·제일신용은행·하나은행·국제산업개발은행·진명합작은행·진성합작은행·고려상업은행·유경상업은행·조선중앙은행·조선무역은행이다. 이 가운데 제일신용은행과 하나은행 등은 지난달 미 하원 의원들이 재무부에 제재를 요구하는 서한에 포함됐다. 제일신용은행은 북한이 싱가포르와 50년간 계약을 맺고 운영하고 있는 합작은행으로 북한 내에서도 유로나 달러 등 외화로만 입출금이 이뤄지는 외화전문 은행이다.

또 고려상업은행은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고 대외 결제를 담당하는 북한의 대표적인 대외 외화거래 은행이다. 정부 당국자는 “북한으로 외화가 유입되거나 해외 결제를 막아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통치자금을 차단하고 핵과 미사일 개발로 전용할 수 없도록 하려는 차원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미국의 제재

미국의 제재

이번 제재가 세컨더리 보이콧의 예고탄이라는 것은 중국의 자본이 투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하나은행 등이 대상에 포함된 데서도 알 수 있다.

조봉현 IBK연구소 부소장은 “제재 대상이 된 은행들은 대부분 실제 영업을 베이징(北京)이나 선양(瀋陽)·다롄(大連) 등 중국에서 하고 있다”며 “이들과 거래하는 중국 은행들도 제재하려는 포석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개인 제재 명단에 무역은행 관계자 중 중국 선양지점장인 김동철과 중국 주하이 지점의 이천환 등을 포함시킨 것도 같은 맥락이다.

② 이란식 제재 모델, 북한에도 통할까=세컨더리 보이콧은 미국의 대이란 제재를 통해 자리 잡은 개념이다. 미국은 2010년 이란 원유를 수입하는 국가는 미국 기업과 거래하지 못하게 하는 이란 제재법을 시행했다. 이란중앙은행 등 금융기관을 제재하고 달러 거래도 사실상 금지했다.

이에 원유 대금 지급 중단, 리알화(이란 통화) 평가절하 등으로 인한 극심한 경제난이 이어졌고 이란 내 민심은 악화했다. 이는 2013년 총선에서 핵 협상을 통한 제재 해제를 공약으로 내건 중도 성향의 로하니 대통령이 압도적인 표 차이로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대외무역이 국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이란과 달리 북한은 고립된 경제체제의 특성을 갖고 있다. 통일부와 KOTRA에 따르면 지난해 북한의 명목 국내총생산(GDP)은 약 36조1030억원인데 수출액은 약 3조2000억원밖에 되지 않았다.

정부 당국자는 “이란과 북한 상황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시간의 차이일 뿐 제재를 꾸준히 유지하면 제재는 효과를 보기 마련”이라며 “북한과 거래 시 세계 금융거래의 중심인 뉴욕의 달러 거래에서 배제된다는 상징적 의미도 크기 때문에 각국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 효과도 있다”고 말했다.

③ 문재인 정부의 첫 독자 제재 나올까=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21일 뉴욕 방문 뒤 귀국하는 기내 간담회에서 “지금은 국제사회가 한목소리로 압박하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후 정부 조치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대북 독자 제재는 출범 이후 벌써 다섯 번째지만, 한국의 독자 제재는 ‘0’이다. 제재 강화 필요성에는 공감하지만 북한과의 대화와 협상에 방점을 찍는 정부의 대북 기조와 상충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외교부는 27일 오전 출입기자단에 문자메시지를 보내 “미국 정부의 제재 대상 추가 지정을 평가한다”는 입장을 냈다. 하지만 ‘환영’이 아닌 ‘평가’로 표현했고, 발표 형식도 외교부 대변인 성명이나 논평보다 격이 낮았다.

남궁영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미국이 의심하거나 혼란스러워하지 않도록 압박을 통해 북한이 비핵화 대화로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들겠다는 우리의 입장을 명확히 해야 미국이 우리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대북 옵션을 쓰게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국을 겨냥하는 미국의 이번 독자 제재에 얼마나 동참할지도 고민이다. 이동률 동덕여대 중국학과 교수는 “중국에 북핵은 한·중 공동의 안보 위협이라는 점을 강조, 북핵 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설득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용수·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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