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 기간 280일인데 … ‘이혼 후 300일’에 발목 잡힌 母心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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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6호 04면

재혼 여성 두 번 울리는 친생부인 소송

친생부인(親生否認) 소송은 일반인에겐 좀 낯선 개념이다. 중앙SUNDAY가 인터뷰한 재혼 여성들 역시 ‘이혼 확정 후 300일 내 출산’이란 현실에 맞닥뜨리고 나서야 알게 됐다. 이 아이가 전남편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음이 명백하더라도 출생신고를 하는 순간 그의 자녀로 간주된다는 사실 말이다. 꼬여버린 가족관계를 정리하려면 최소 4~5개월 걸리는 소송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이를 법원에 허가 신청을 하는 방식으로 간소화하자는 게 지난 4월 정부가 발의한 민법 개정안의 골자다.

이혼 후 낳은 아이 출생신고 하면 #전남편 자녀로 등록, 소송 불가피 #사생활 침해, 소송비 등 이중 피해 #신고 미루면 건보 혜택 등 못 받아 #“정부안 미흡” 국회서 수정 논의

하지만 재혼 여성들은 이혼 후 300일 내 출생자를 전남편의 자녀로 추정하는 민법 제844조 2항, 이른바 ‘300일 조항’의 필요성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1958년 민법이 제정될 당시에는 유전자 검사 등 과학기술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전남편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는 이혼 후 일정 기간 공백기를 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여성은 이혼 후 6개월간 재혼해선 안 된다는 재혼 금지 조항도 있었는데 2005년 민법 개정으로 삭제됐다. 유전자 검사만으로도 쉽게 친자 확인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과잉 입법이라고 본 거였다.

“아이 인권이란 관점에서 봐야”

이혼과 재혼은 이미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는 하나의 사회적 현상이 됐다. 300일 조항 때문에 재혼 여성들이 겪는 고충은 언제든 나의 일, 내 가족의 일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최근 5년간 추이를 보면 재판상 이혼은 한 해 평균 4만 건, 협의 이혼은 13만 건에 달한다. 친자관계 관련 소송도 2012년 416건에서 지난해 796건으로 크게 늘었다. 300일이란 기준 자체의 적절성도 따져볼 문제다. 의학적으로 여성의 평균 임신 기간은 280일이다. 그러다 보니 법적으로 이혼이 확정된 뒤 임신했는데도 아이가 10여 일을 더 못 채우고 나와 300일 조항에 걸리는 경우마저 생기고 있다.

서울 동대문구에 거주하는 C씨(31)도 그런 경우다. 그는 전남편이 결혼 전 1억원의 빚을 숨긴 문제 등으로 갈등을 겪다가 2012년부터 별거해 왔다. 2014년 이혼 소송을 시작했지만 전남편이 양육비를 줄 수 없다며 항소해 2심까지 마무리하는 데 1년8개월이나 걸렸다. 지난해 5월 이혼이 확정된 뒤 새 가정을 꾸렸는데 지난 3월 아이가 태어나 계산해 보니 이혼 확정 판결 후 280여 일이 지난 상태였다. 답답한 마음에 포털 사이트 게시판에 사연을 올렸더니 “네가 나쁜 년이다” “바람피운 것 아니냐” 등 악플이 달려 마음에 상처만 남았다.

C씨는 전남편과 얽히기 싫어 일단 출생신고를 미뤘다. 하지만 아이가 아토피를 앓고 있어 건강보험 혜택 없이 병원에 계속 다니는 게 적잖은 부담이었다. C씨는 “아이 예방접종 하나만 하려 해도 왜 출생신고를 안 했는지 병원이나 구청에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다”며 “바람을 피워 난 아이도 아닌데 내가 왜 이렇게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 수치스러움을 느껴야 하나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털어놨다. 버티다 못해 지난 4월 친생부인 소송을 시작했다. 법정에서 판사는 전남편에게 “이 아이가 당신의 아이가 맞느냐”고 물었고 그는 “아니다”고 답했다. 1분도 안 걸리는 형식적인 재판이었지만 소송 비용은 물론 심적 괴로움은 모두 재혼 여성의 몫이었다.

경북에 사는 30대 D씨의 사연은 더 기구하다. 그는 생후 100일도 안 된 아이와 월셋방에서 단둘이 살고 있다. 출생신고를 하려고 면사무소에 갔다가 아이가 전남편의 호적에 등록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이가 태어난 날짜를 계산해 보니 이혼 후 282일 만이었다. 법정에서 최종적으로 이혼 선고를 받은 직후 생각을 정리하려고 여행을 떠났는데, 거기서 우연히 만난 한 남성과의 하룻밤이 임신으로 이어질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 남성과는 이름도 연락처도 공유하지 않아 생부를 찾을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다.

D씨는 아무도 모르게 아이를 지우려다 어느 순간 ‘그토록 원했던 아이가 생겼는데’라는 생각에 출산을 결심했다고 한다. 전남편과는 4년 동안 아이가 안 생겼기 때문이다. 요즘 세상에 싱글맘이 뭐 어떠냐며 부모님을 설득해 봤지만 결국 집에서도 쫓겨났다. 어머니가 비자금이라며 건네준 돈으로 겨우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30만원짜리 방을 구했다. 법적으론 미혼모도 한부모 가정도 아닌 만큼 아무런 경제적 지원을 못 받고 있다.

E씨는 친생부인 소송을 피하기 위해 ‘원정출산’을 했다. 캐나다에서 아이를 낳고 2년 정도 지내다 법이 개정될 수 있다는 소식에 지난 3월 한국으로 돌아왔다. 만 3세가 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싶었지만 한국 국적이 없어 불가능했다. 외국인 출생 증명서를 내놓아도 부모가 한국 사람이라 안 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게다가 아이가 무비자로 한국에 머물 수 있는 기간이 6개월뿐이라 9월이 되면 다시 출국해야 한다. E씨는 “전남편이 정상이 아니라서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정부 개정안도 전남편의 권리는 보장해야 한다면서 아이의 인권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소송 간소화만으론 한계 여전

재혼 여성들이 아이의 출생신고를 보류할 만큼 소송을 꺼리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사생활 침해 문제다. 현재 남편과 아이의 얼굴 사진, 유전자 검사 결과 등을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전남편은 소송 과정에서 이 내용은 물론 전부인의 거주지까지 알게 된다. 더구나 전남편의 폭언이나 폭행에 시달렸다면 잠깐이라 해도 법정에서 마주치는 것 자체가 큰 고통이다.

둘째는 비용적 부담이다. 친생부인 소송을 위한 변호사 선임 비용은 최소 300만원 이상이라고 한다. 행정사에게 서류 작성만 도와 달라고 해도 유전자 검사 비용까지 60여만원이 든다. 전남편이 전부인의 외도를 내세워 위자료 청구 소송을 벌일 가능성도 있다. 사실 여부를 떠나 소송에 휘말리면 시간과 돈이 든다.

정부안대로라면 어느 정도의 소송 비용은 절감할 수 있다. 하지만 전남편이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생기는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무엇보다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지적이 나온다. 3개월 된 아이의 출생신고를 고민하다 결국 소송을 준비 중인 F씨는 “전남편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협조해 달라고 하니 검토해 보겠다는 식의 냉담한 반응이었다”며 “그 또한 이혼 소송 중에 애인이 있었고 과거에 바람도 많이 피웠는데 내가 법적 이혼이 마무리되기 전에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약점을 잡아 돈을 뜯어내려 할까봐 두렵다”고 말했다.

국회 법사위 소속인 오신환 바른정당 의원은 “유전자 검사 결과가 모호한 경우 등 꼭 필요할 때만 전남편 의견을 청취하도록 해 아이와 재혼 여성의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는 방향으로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말했다.

김경희 기자 am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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