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새 이민정책에 백악관, 기자들과 설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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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새 이민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아마 뉴욕타임스(NYT)에도 외국에서 온 미숙련·저임금 근로자가 넘쳐날 것이다. 그럼 NYT는 어떻게 느낄까?"(스티브 밀러 백악관 정책고문)
"지금 이야기에 구체적 통계적 근거를 제시하라."(NYT 글렌 트러시 기자)
"그건 상식 문제다. 미국 노동자들을 위해 연민을 가질 때가 됐다."(밀러)
"상식을 묻는 게 아니라 미 노동자들의 임금이 이민자들에 의해 줄어든다는 근거를 대라는 것이다."(트러시)
2일(현지시간) 오후 3시 백악관 브리핑룸에선 이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내놓은 새로운 이민정책을 놓고 백악관과 기자단 사이에 가시돋친 설전이 전개됐다.
새 이민정책의 골자는 가족 중 한 명이 미국에 정착하면 다른 가족들이 미국에 와 줄줄이 영주권을 받는 시스템에 메스를 가하는 것. 현재 연간 100만 명 수준을 향후 10년 이내에 절반으로 줄일 방침이다. 또한 이민 신청자 중 미숙련·저임금 근로자를 최대한 억제하고 미 경제에 도움이 되는 특정기술 보유자와 영어 능통자를 선별해 뽑는 정책을 취할 예정이다. 이름하여 '기술·성과주의 이민제도'.
새 이민정책을 주도한 밀러 정책고문은 "기술을 인정받아 미국에 이민 오는 사람의 비중은 15명 중 한 명 꼴에 불과하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영어 능통자' 부분에서 이번에는 CNN의 백악관 출입기자인 짐 아코스타가 발끈했다. 그는 쿠바 출신 이민자 2세다.

"자유의 여신상에는 '자유를 바라는 그대여, 가난에 찌들어 지친 자들이여, 내게로 오라'고 써 있다. 새 이민정책은 이런 미국의 정신에 근본적으로 위배되는 것 아니냐."(아코스타)
"그 글귀는 원래부터 있던 게 아니다. 나중에 가져다 붙인 것이다."(밀러)
"이민자들은 영어를 제 2언어로 (나중에) 배울 수 있다. 그런데 미리 영어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건 영국과 호주 출신만 데리고 오겠다는 건가."(아코스타)
"난 당신 말에 충격을 받았다. 영국이나 호주 출신 사람만 영어를 구사한다고 생각하는 국제적 편견이 놀랍다. 전 세계에서 온, 영어를 구사하는 수백만 명의 이민자를 모욕하고 있다."(밀러)
밀러 고문은 아코스타 기자에 "이는 그동안의 당신 발언 중 가장 터무니없고 모욕적이고 무식한 것"이라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이민자를 배려해 온 미국의 기존 정책이 바뀌는 이유를 물으며 은유적으로 비유한 '영국과 호주 출신'이란 표현을 붙잡고 늘어진 것이다.
밀러 고문은 33세로 백악관 내에선 스티브 배넌 수석전략가와 더불어 '투 스티브'라 불릴 정도로 강한 보수성향을 지니고 있다.
CNN은 "새 이민 정책에 따르면 더 이상 미국은 이민자들에게 '기회의 땅'아 아니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일각에선 "앞으로는 영어에 능통한 컴퓨터 기술자가 아니라면 미국 이민 자체가 어려지는 게 아니냐"는 관측까지 나온다. 실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주 오하이오주의 연설에서 "영어 잘하는 근로자를 받아들이겠다"고 못박기도 했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엔리케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엔리케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한편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31일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이 전화로 자신의 이민정책을 칭찬했다고 소개한 데 대해 멕시코 대통령궁이 성명을 통해 "최근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한 사실이 없다"고 반박하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이에 백악관은 2일 "전화는 아니고 실제 그런 대화는 있었다"는 궁색한 해명을 내놨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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